순수(純粹)

By | 2022년 4월 13일

순수(純粹) 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많은 사람들은 “순수”를 예찬한다. 따라서 “순수함”을 추구한다. 아마도 그 순수성을 잃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순수성, 그러기에 더욱 순수함을 추구하고, 순수함을 예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순수란 본질에 비본질이 섞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삶에서 순수란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 속에는 늘 개인이나 집단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탐욕, 때는 못된 생각들이 섞이게 되는데, 그럴 경우에는 우리는 “순수성을 잃었다.”라고 규정한다.

순수란 정지된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수란 열정없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계속 역동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삶 속에서, 때론 열정과 정열이 넘치는 모습 속에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순수”이다.

우리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순수를 잃었다. 이유는 간단한다. 사사로운 욕심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사회 전반적인 모습에서도, 심지어는 문화예술 속에서도 본질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돈”에 대한 욕심히 개입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욕심은 모두 “돈”과 “권력”에서 비롯하는데,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를 잠식해가고 있다.

심지어는 교육분야에까지 이른다.

되돌릴 수는 없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온세상이 뒤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순수성을 잃은 인간의 의지로는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다. 결국 역사 속에서 그 정답을 찾을 수 있다. 비극적인 생각이지만 역사는 그것을 후손들에게 역력이 보여주고 있다. 그 역사가 반복되기 전까지는 인간은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 역사의 반복은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도 닥치게 될 것이다.

그 역사가 보여 주듯이, 그나마 순수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보스러운 사람들 말이다. 그런 바보들이 많은 세상을 꿈꾸어 본다. 온전한 순수성이 회복되기 힘든 세상 속에서 말이다.

이런 바보가 되는 것은 간단하다.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선과 악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 본질 안에 들어 있는 악을 완전하게 내쫒을 수는 없다. 백퍼센트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과 악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유일한 순수성을 유지하는 바보가 되는 길이다.

어떤 생각을,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공익’울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라로운 욕심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머리가 좋은 사람, 더 많이 배운 사람에게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과 권력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이미 순수성을 잃어버린 세상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자신에게 오늘 새벽부터 계속 던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2 thoughts on “순수(純粹)

  1. 김익명

    교수님 글을 읽고 나니 니체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약한 자들은 강한 자를 강하다고 하지 않는다, 악하다고 하지
    강한 자들은 약한 자를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약하다고 하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이 죽은 서구사회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했고, 실제로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돈과 명예만을 추구하는 현상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의학을 공부 하다 보면, 한낱 핵산쪼가리에 불과한 바이러스조차 종족 번식을 위해 죽이고, 경쟁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쟁이란 것이 이미 분자적 특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면서도,
    인간도 결국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딘지 모르게 참 답답합니다.

    최근 계곡 살인 사건이 화제입니다.
    용의자의 성형 전 얼굴을 보니 저는 한편으로는 피해자 뿐만 아니라 용의자도 참 안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춘 하면서, 외모에 의한 박탈감을 느끼면서 인생은 결코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연애, 결혼에 외모가 다가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말이 생긴 것부터 이미 외모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뜻이지요.

    법적으로 당연히 책임져야 할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과연 누가 용의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피해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면 삐뚤어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요즘 참 많은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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