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라는 종교건물 안에 갇히면,

By | 2021년 5월 1일
  • “불의에 침묵하는 것”을 “순종”이란 이름으로 둔갑시킨다.
  • “물질적 착취”를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란 이름으로 속인다.
  • “육체적 착취”를 “헌신”이란 이름으로 만들어 버린다.

‘교회’란 성도들의 모임이다. 한국교회에선 어느덧 교회는 “교회건물”을 의미하게 되었다. 교회가 성장했다는 표현은 교회건물이 커졌다라는 의미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믿음이 성장했다라는 의미는 종교적 행위(예배참석의 횟수와 비례하는)와 헌금의 액수를 의미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 갇히면 그것이 절대 기준이 되어 버린다.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질 못한다.

목회의 능력은 “성도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것과 그들의 말에 반대없이 순종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달콤한 말이거나, 때로는 그들을 협박하는 말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성경말씀 해석을 하지 못한다. 일종의 “썰”을 푸는 것이다. 교회 안에 갇히면 그것이 진리인냥 인식하고 세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이상한 집단으로 취급한다. 그동안 기독교가 보여준 ‘비상식’과 ‘비합리’, ‘비과학’, ‘비지성’ 적인 모습 때문에 만들어진 현상이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대학교수가 학생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보다, 교회 주차장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것을 더 ‘은혜스럽다’라고 표현한다. 물론, 때론 가장 겸손한 자리에서 봉사하는 것이 아름다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상식적인 삶의 모습들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미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절대로 ‘비상식’과 ‘비합리’, ‘비과학’, ‘비지성’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그렇게 변질되는데는 “기독교의 미신화”의 결과이다. 기독교의 상당부분은 이미 샤마니즘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샤마니즘적 기독교의 가르침(이것은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적 사고가 아니다.)이 현대교회에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언급한 바 있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을 내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종교”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는 기복적 신앙이 깔려 있는 우리 문화에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서의 “신”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쉽게 샤마니즘적 가르침에 쉽게 넘어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사마니즘적 가르침은 신학적 배경이 약한 목회자나 의도적인 신학적 왜곡을 하는 목회자들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샤마니즘에 교회에 들어오면서 “착취”는 미화되었고, 순종이란 이름으로 불의에 눈감아버리는 “비기독교적 행태’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는 이상한 집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집단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지경에 있는 한국교회는 얼마지나지 않아 쇠퇴할 것이 분명하다.

역사의 반복이니 이 또한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자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럼에도 개혁은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샤마니즘화되어 있는 기득권세력들은 그 기득권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답은 뻔하다. 완전히 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없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인들은 교회건물 안에 가두어 버렸다. 성경에 쓰여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데, 교회건물 안에서 스스로 샤마니즘에 갇혀 신앙생활, 아니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2022년 2월 11일에 공개글로 전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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