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이 받는 유혹

By | 2014년 1월 24일

아침 일찍 (새벽에) 문자 하나가 온다. 자신의 딸을 위한 기도를 해달라는 부탁이다. 기도 내용을 보니 기도가 되질 않는다. 부모로서의 자식을 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난 솔직히 그 기도를 하나님께 할 수가 없다. 그 기도 내용이 “비전”이나 “사명”, 그리고 “소명”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부모의 욕심이다.

내가 미리 판단하고 결정할 사항은 아니지만, 그 딸은 아직 자신의 지식과 인격을 쌓는데 힘을 써야 할 나이이다. 즉, 사회적 구성원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 과정에 있는 나이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는 상황인데도, 누군가를 가르쳐야 할 자리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하니 도저희 기도가 되질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혹”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자신의 자식이 빨리 남들 앞에 그럴싸한 모습으로 서있길 원하는 그런 부모의 심정에 더해지는 “유혹”이다. 더 준비되어진다면 더 크게 사용될 것 같은데 미리 앞서가는 것은 아닐까? 질그릇을 굽는 과정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마지막 뜨거운 불에 굽는 과정을 거친 후 그릇이 그 용도에 맞게 사용되는 것인데, 미리 꺼내서 말려서 사용한다면 그릇은 잠깐 쓰이다가 버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나 자식이 사회적으로 잘 되고, 사회에 공헌하며, 크리스천의 경우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그런 인물들이 되길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는 과정에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나는 바울교회에서 인재들이 나오길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바탕에 하나님과의 온전한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인재들이 나오길 말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였지만, 늘 다윗처럼 겸손하고 솔로몬처럼 지혜로운 그런 인재 말이다.

부모들은 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식이 성장하여 독립할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며, 돕는 역할을 감당해 가야 하는 것이다. 자식이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하라고 강요하거나 유도하면 안된다. 그런 자리에 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모습이 부모에게는 필요한 셈이다. 좋은 그릇을 만들어 놓아야 그만큼 크게 쓰임받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역사를 이루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적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나씩 하나씩 해가야 한다. 그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준비되어 갈 때 하나님은 부르신다. 아브라함을, 요셉을, 다윗을, 바울을, 베드로를 그냥 쓰지 않으셨다. 그들도 그런 준비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셨다. 조급함과 성급함의 유혹이 부모들 앞에 늘 놓여 있는 것이다. 조급함과 성급함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흩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 결과는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의 길과 시간들을 놓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아이와 부모를 위해 기도한다. 그 기도제목이 그 부모들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지만, 선한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며 난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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