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11] 죽을 나르던 엄마들

By | 2014년 9월 14일

이 기억은 내가 초등학교들어가기 전 해의 이야기일 것이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서 큰 솥에 죽을 끓여서 학교에 가지고 갔던 이야기이다. 매일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가끔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학급에 간식을 넣은 것과 같은 일이었다.

물론 고학년 학생들은 도시락을 사가지고 다녔겠지만 배고팠던 시절이라 동네별로 돌아가며 죽을 쑤어서 가져가곤 했다. 우리마을에서 학교까지 1km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엄마들이 그렇게 죽을 쑤어서 머리에 이고 날랐던 기억이다.

지금 어떤 엄마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다.

그 죽은 쌀과 밀가루반죽을 잘게 넣었고, 옥수수가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좁쌀도 들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내가 따라가서 얻어 먹고온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이런 간식방법은 없어졌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건빵이 나왔는데, 지금 수퍼에서 파는 엄지 손톱만한 건빵이 아니라 손바닥만한 건빵이다. 그 건빵은 밀가루포대 크기의 포대에 담아 있었는데, 학급별로 배급을 받아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개는 학생당 5개에서 10개정도 받았다. 배급할 때 량이 달랐기 때문에 학생들이 받는 것도 달라졌다.

대개의 경우는 하교길에 다 먹어버리기 일쑤였지만, 집에까지 가져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학교에 배급된 건빵 중 일부는 포대기 단위로 개인에게 매매가 되기도 했는데, 그 돈은 아마도 학교 운영비로 쓰였던 것 같다. 학교차원에서 이루어졌던 일로 분명히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운영비가 거의 없던 시골학교에서 현금으로 세탁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것을 교장이나 교사가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일로 학교에 보급된 “어깨동무”, “새소년”. 보물섬”과 같은 어린이용 잡지들도 개인에게 판매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상황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일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사회적 용납이 이루어지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가난했던 시절, 그렇게 엄마들이 돌아가며 쑤어주던 죽을 먹고, 때론 곰팡이가 피어 있어도 배급받았던 건빵을 먹고 자랐던 세대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들이 되었다. 당시에 배가 고파서, 헐벗어서, 가난해서 그것을 벗어나고자 억척스럽게 살았던 세대들이 우리나라를 이만큼 잘 살게 만들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그런 시절을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 세대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는 것이 좋은 양육이고 교육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자녀세대들을 잘못 키우는 실수도 함께 저지르고 말았다.

가난을 벗어난 것은 좋았지만 자녀세대들에게 “감사”를 알지 못하게 했고,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많이 가르쳐놓은 자녀세대들은 “철학”이 없는 삶을 살고 있고, 힘겹게 가난과 싸우며 흘린 “땀방울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처럼 많은 것을 갖춘 세대들보다 가난과 풍요를 다 경험한 기성세대들이 인생의 가치를 더욱 잘 아는 세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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