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실제 우리학교 대표선수이기도 했다. 맨날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축구를 하곤 했다. 그러니 얼굴이고 팔이 시커멓게 그을려 다녔다. 대학교에 다닐때까지 난 내 피부가 까만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축구공이 모두 고무였다. 바람을 좀 많이 넣으면 바운딩이 심하게 되고, 바람이 조금이라도 적으면 아무리 차도 멀리가지 않았다. 가죽 축구동은 학교에만 있었다. 개인이 가죽 축구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학교에서 축구공을 훔쳤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3학년 때 추석전날, 아버지께서 가죽 축구공을 사오셨다. 그 추석날이 미국인이 처음 우리 동네에 온 날이이기도 했다(이 이야기는 이미 적은 바 있다. 8. 처음보는 외국인).
차가 별로 없던 그 때에는 신작로나 동네 소나무 동산, 또는 마을회관 공터에서 공을 차곤 했다. 겨울에는 벼를 짧게 자른 논(그런 논 중에서도 습하지 않은 단단한 논바닥을 가진 논들이 있었다)에서 차곤했다. 가죽 축구공을 받은 나는 신작로에서 공을 찼는데 한시간도 채 놀지 않은 상황에서 그 축구공이 교회 담벼락이었던 탱자나무 가시에 그만 찔리고 말았다.
가죽 축구공은 고무 튜브를 가죽이 싸고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가시가 가죽을 뚫고 그 고무튜브까지 찔러버린 것이다. 바람이 빠져버린 가죽 축구공을 붙잡고 한참 울던 나는 구두수선집으로 갔다. 조그마한 구둣가게가 있었는데(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본업은 아니었으니라) 그곳에 가서 가시가 박힌 부분의 가죽에 묶인 실밥을 풀었다(당시 축구공은 오각형 검은색과 육각형 흰색 가죽으로 구성된다). 왜냐면 그 실밥들이 모두 안쪽으로 꿰매어 있기 때문이다.
육각형 가죽하나를 푼 상태로 나는 자전거 수리점으로 갔다(아마도 이 아저씨도 본업은 농사였고 부업으로 자전거 수리점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탱자가시에 찔린 부분을 자전거 튜브(당시에 자전거 타이어도 안쪽의 고무튜브와 바깥쪽 고무 타이어로 되어 있었다)의 펑크를 수리하듯 줄로 잘 긁어낸 후 거기에 본드를 바르고 엄지 손톱만한 고무를 덧대어 붙였다. 본드로 붙이는 일은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해야 제대로 붙고, 나중에 떨어지지 않는다.
바람을 넣어 붙인 부분이 잘 붙었는지를 확인한 후에 다시 바람을 빼주었다. 나는 곧바로 다시 구두 수선점으로 갔다. 처음에 뜯어냈던 육각현 흰색가죽을 실로 잘 꿰매어 주었다. 바깥으로 실밥이 보이지 않도록 꿰매는 것이 그 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실밥이 있으면 금새 닳아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꿰맨 축구공을 다시 자전거 수리점으로 가져가서 바람을 넣었다. 추석전날의 몇시간이 그렇게 가버렸다.
잊지 못할 가죽 축구공이다. 그 후에 나는 그 축구공을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고 아주 오랫동안 그 축구공으로 축구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