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33] 사진사 아저씨

By | 2014년 9월 17일

우리가족들은 어려서 부터 사진이 있다. 읍내에 나가야 겨우 사진을 찍을 수 있던 시절, 시골동네에서 어떻게 사진을 그렇게 자주 찍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모두 조규천 아저씨 덕분이다. 조규천 아저씨는 아버지와 동갑내기 친구이시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 서무과에서 일을 하셨고, 학교 바로 앞에서 문방구와 교사들을 위한 하숙집도 운영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그 분은 도깨불치라는 동네에서 사셨다. 나중에 도깨불치 이야기는 따로 적는다. 도깨불치는 우리집에서 간척지 논쪽으로 바라보면 바닷가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가깝지도 않은 거리다. 가끔 우리집에 오셔서 사진을 찍으셨는데 얼마후에 사진을 인화해서 가져오셨다.

당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나중에 ‘전기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사진을 인화했을까?’ 궁금했다. 필름현상이야 현상액만 있으면 어두운 밤에 어두운 곳에서(암실이 따로 필요없다) 작업을 하면 되니깐 상관이 없지만, 현상된 필름을 인화지에 인화하는 과정은 분명히 빛이 필요한데 궁금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도 그냥 밝은 빛이 아니라 적당한 빛을 적당한 시간동안 비추어야 사진인화작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집에 있던 작업실인 암실의 벽에 뚫어놓은 구멍이었다. 그 구멍으로 밖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을 조절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낮시간에 밖에 빛이 있는 상태에서 작업을 해야 하고, 또 빛의 량을 조절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텐데,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다. 아마도 요즈음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 아저씨 덕분에 어려서 사진이 꽤나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쯤에는 카메라의 보급과 사진 인화가 발달되어 칼라사진까지 등장했기 때문에 조규천 아저씨는 전업을 했던 것 같다.

가족사진

우리집 최초의 가족사진. 나는 썩은 사과 문제로 삐져서 업드려 있어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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