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40] 두부집 이야기 – 생두부를 잘 먹지 않는 이유

By | 2014년 9월 18일

우리집에서 나와 우체국을 지나면 두부집이 나온다. 주인은 1.4후퇴때 피난온 피난민이다. 그집 아저씨는 기억이 없지만 두부를 팔던 아주머니는 생각이 난다. 그 집은 담이 없어서 길에서 바로 마당으로 들어간다. 부엌앞 마당에는 두부를 삶는 큰 솥에서 항상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고, 때로는 두부 뿐만 아니라 찐빵을 쪄서 팔기도 했다. 그리고 막걸리도 팔았다. 큰 통에 넣은 막걸리를 주걱으로 휙휙 저은 다음에 주전자에 담아주곤 했다.

당시 진도에는 한국동란 때 피난온 사람들이 많았다. 안농리(금골리와 신동리 사이에 위치하지만 금골리와는 붙어 있는)는 피난민들이 집단 거주하는 마을이다. 그러나 두부집처럼 다른 마을에 단독으로 들어와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북한에 자신이 소유하는 땅을 다 버리고 피난 온 처지라 그렇게 두부와 찐빵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당시 안농리 사람들은 주로 엿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나는 종종 두부집에 심부름을 갔다. 집에 손님이 오시면 막걸리나 두부를 사러 갔었다(이를테면 “훌떡바 선생님” 이야기에서 처럼). 문제는 그 집에 결핵환자가 있었다. 그 아주머니 남편인지 아니면 부모인지는 모르겠으나 결핵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나는 두부를 사러가면서도 늘 찜찜해 하곤 했다. 가능하면 그 아주머니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는 것을 꺼렸다. 그 얼마나 웃긴 행동인가? 어린 마음에 결핵을 무서워했었나 보다.

나는 2001년에 캐나다에 방문교수로 가기위해 비자발급용 신체검사를 받던 중 내게 결핵흔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 때문에 비자도 늦어지고, 반복적인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폐에 있던 흔적이 결핵흔적인지 아니면 폐렴을 앓았던 흔적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것으로 인해 캐나다에 살면서도 그곳 의사(독일출신 내과의사, 나중에 내가 다니던 캐나다인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와 싸워야 했다.

아무튼 당시에는 결핵환자들이 많았다. 내 기억으로 둔전리 선종이네 할머니도 결핵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선종이가 소독약을 사러왔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당시 팔았던 소독약이 크레졸이었는데 지금 되돌아 보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결핵환자가 돌아가셨으니 그것으로나마 소독을 했어야 했던 시절이다. 상가집에 크레졸 냄새가 3일동안 끊이지 않았었다.

그 결핵이 오늘날의 한국의 위상을 떨어뜨리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2012년 질병관리본부의 자료에 따르면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40,000여명의 환자가 신고되어 있다. 신고가 누락되었거나 제대로 진단을 받지 못하는 환자까지 포함한다면 아직도 유병률이 높은 질환이다.

나는 그 뒤로 생두부를 잘 먹지 않았다. 아주 긴 시간동안 생두부 먹는 것을 싫어했다. 익힌 것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먹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잘 먹는 음식이지만 생두부를 한동안 먹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 기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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