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노랑색의 시멘트 푯말이 있다. 세로방향으로 “접도구역”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있었다.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푯말이었다. 그것에 관련된 일을 겪고 나서야 접도구역 푯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원래 우리집은 두 채로 구성되어 있다. 약방과 안방이 있는 양철지붕집과 또 하나는 직각으로 배열하고 있는 초가집이었다. 초가집은 가운데 부엌이 있고 양쪽으로 방들이 있는 그런 전형적인 집이다. 부엌은 앞뒤로 문이 있어 뒷문으로 가면 바로 텃밭으로 연결된다.
1960년대 후반에(정확한 연도는 모른다) 초가집을 허물고 집을 지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지었기 때문에 두 집에 겹쳐서 기억을 혼란스럽게 만들 정도로 원래 집 자리에 새 집을 지은 것이다.
72년이었는지 73년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군청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그리고 철거명령을 하였다. 이유는 접도구역내에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나왔을 때 아버지가 “가시면서 신문 보세요”라고 접혀진 신문을 뒷호주머니에 넣어드리는 것을 보았다. 그 신문지 속에는 돈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뒤 아버지는 그 집의 천장을 뜯고 대들보에 적힌 날짜를 지우고 수정했다. 상량식(건축 기본 골조를 세우고 대들보를 올릴 때 하는 의식) 때 대들보에 그날의 날짜를 기록해 두는데 그것을 수정하려고 한 것이다. 건축물 등록일이 접도구역이 적용된 이후에 지어진 것이라 철거를 해야 했지만, 아버지는 그 집을 허무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대들보의 날짜를 수정하려고 한 것이다.
4학년 때, 그러니깐 1973년 2학기(2학기 시작시점이었던 것 같다)에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새 집의 2/3가 철거되고 부억과 방한칸만 덜렁 남아 있었다. 그날은 나보다 열살이 어린 막내 동생의 첫 생일인 돌이기도 했다. 돌잔치를 해야 하는 날에 집을 허물어 버렸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날 돌 기념 떡도 만들지 못했다. 풍문에 떠도는 “돌에 떡 안해주면 아이가 잘 넘어진다”라는 말이 맞기라도 하듯이 돌 떡을 얻어먹지 못한 막내는 자라면서 잘 넘어지곤 했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그 집은 허문 그대로 금골리로 옮겨서 새롭게 집을 짓기 시작했고 수개월 후 우리는 금골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를 한 것은 약방을 하는 우리집에게는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왔지만, 당시에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두려움은 어린 나에게도 존재했었다.
재미있는 것은 40년이 훌쩍넘은 지금까지 우리집 앞길은 접도구역까지 넓혀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옛날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만, 흙길에서 아스팔트만 덮었을 뿐이다. 또한 아버지가 뒷호주머니에 꼽아준 신문을 지프차를 타자마자 꺼내보던 그 군청직원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