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미술시간, 나는 우리 학년에서 가장 키가 컸기 때문에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교실 뒷쪽문 바로 입구에 말이다. 그날은 붓글씨를 쓰는 날이었다.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는데 3학년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윤영동 선생님께서 복도를 지나가시다가 잠시 들리셨다.
내가 글씨를 쓰는 것을 보시더니 최인규 담임선생님께 가시더니 “내가 형태를 가르쳐야겠다. 그렇게 해달라”고 하셨고, 나는 그 다음주 부터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에 최인규 선생님은 화가이셨기 때문에, 담임을 맡고 있던 반아이를 따로 가르치기 위해선 그렇게 허락을 받는 절차를 거치셨던 것 같다. 아버지께도 허락을 받았다. 윤영돈 선생님께서 자신이 사용하시던 붓도 선물하셨다. 그 뒤로 아버지께서 새 붓을 사주셨지만, 난 선생님이 주신 붓을 오랫동안 사용했다.
당시에 수업시간에는 주로 신문지와 마분지에 붓글씨를 썼는데, 윤영돈 선생님께서는 가끔 화선지에 직접 글씨를 쓰게 하셨다. 그 뒤로 방학 숙제로 내는 붓글씨는 늘 상을 받았다. 나는 아버지가 사주신 화선지 절반에 45자 시조를 늘 썼다. 나는 집에서도 붓글씨를 썼다.
아버지께서는 붓글씨를 쓰고 있는 저를 보시고 “축구공을 차고 놀 때나 친구들하고 놀 때면 ‘어떻게 저 애가 붓글씨를 쓰지?’라고 생각했는데, 글씨를 쓸 때면 정말 차분해지는 것이 신기하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아마도 나는 붓글씨를 통해 “정적인 태도”가 학습되었던 것 같다. 밖에서 공을 차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서와서 붓글씨를 쓸 때면 “동”과 “정”의 경계를 넘나들었는지도 모른다.
4학년 때 처음으로 읍내에서 열리는 서예가 장전 하남호 선생님이 심사하시는 대회에서 참석했다가 장려상을 받았다. 그 뒤로 몇몇 대회에서 계속 입상하였다.
나의 서예는 중학교때까지 이어졌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반공”에 관련된 대회에 출품했다가 입상을 하였다. 그 상을 수상하기 위해 광주에까지 다녀왔는데 그 상을 전달하려고 교장실에 갔다가 교장선생님께서 한 말씀을 하셨다. “형태야, 앞으로 공부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붓글씨를 선택할 것이냐?”라고 질문하셨다. 나는 “당연히 공부죠”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나는 서예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시절 배웠던 서예는 지금도 가끔 글씨를 써보면 그 떄의 느낌이 되살아나곤 한다. 언젠가 더 늙으면 다시한번 해보려고 한다.
“산태아모끌티”는 우리집 큰 방에서 걸려 있던 내가 큰 액자의 글귀이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쓴 글씨인데 막내 동생이 글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서 일어난 에피소드이다. 원래 글귀는 “티끌모아태산”이다.
내가 글씨를 그만 두고(어린 것이 글씨를 그만 두었다는 표현이 건방지지만) 바로 아래 여동생이 대학에 간 후 글씨를 시작했는데 작은 글씨를 참 예쁘게 썼다. 동생이 쓴 충무공기념비의 액자는 진도의 어느 기관에서 보호하고 있는데, 시간이 되면 찾아봐야겠다.
- 추가 : 이 글을 읽은 동생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윤영동 선생님은 강진 도암 출신이며, 후에 한국화가로 등단하였다. 호는 “치봉(稚峰)”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