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렸을 때는 625동란 때의 사진에서 보는 민둥산은 없었다. 그동안 산림보호정책으로 인해 숲에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매년 4월 5일 식목일이 되면 학교에서 묘목을 받아서 정해진 산에 가서 심었다. 나무는 주로 마을별로 구역이 할당되었다.
고학년부터 저학년까지 구성되어 주어진 나무를 다 심어야 식목일의 일정이 끝이 났다. 초등학생들이 삽을 들고 나무를 들고, 양동이에 물을 들고 산을 올라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요즈음의 초등학생들에겐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매년 식목이면 늘 그렇게 했다. 식목일 무렵이면 산에 뱀이 나온다. 땅을 파다가 뱀을 보기도 하고, 산으로 올라가던 중 숲에서 뱀이 나와 내 운동화 위로 지나간 적도 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뱀을 싫어한다.
그렇게 산에 나무를 심고 가꾼 결과로 오늘날 우리나라 숲은 울창하다. 그리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관리가 되고 있다. 당시에는 나무가시를 베는 일은 불법이었다. 나무가지를 쳐주어야 나무가 잘 자라고, 땅에 햇볕이 드는데 나무가지에 손을 대면 경찰에서 잡아간다는 말이 있었다. 땔감으로 쓸 나무는 땅바닥에 떨어진 솔잎이나 가지를 모아 줍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낫으로 가지를 살짝살짝 쳐서 가져왔다. 나는 직접 이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일하는 누나랑 같이 산에 가게 되면 그 일을 돕곤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진도에 연탄이 배달이 되지 않았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는 구조였다. 산에서 해온 나무나 장작을 써야만 했다. 당시에 좀 더 저비용으로 불을 지필 수 있는 방법이 “등겨(벼껍질)”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등겨는 불에 잘 붙지 않는다. 따라서 계속 바람을 불어주어야 한다. 그 바람을 불어주는 풍로가 필요했다. 이 풍로는 손으로 계속 돌려야 한다. 손잡이와 날개 사이에 검정 고무줄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게 잘 끊어지곤 했다. 그러나 등겨는 관리도 쉽지 않았고 번거러운 연료라고 생각된다.
우리집에는 약이 배달될 때 오는 박스들이 많아 그것을 찢어서 불을 지폈기 때문에 처음을 불 붙이는 일이 그나마 수월했다. 그런데 온들을 데우고, 밥을 하고, 물을 끓이는데 이런 방법을 매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번거럽고 힘든 일이었을까?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서야 우리 동네에 연탄이 보급되었다. 진도까지 연탄이 들어오면 수송비용이 증가하여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에 보급이 늦어진 듯 하다. 물론 아궁이를 변경하는 등 비용이 만만치 않은 이유도 있었으리라.
이런 모습이 불과 40여년전의 우리 시골마을의 모습이다. 요즈음 아이들이 상상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산에 오르는 입구에는 항상 “산림보호”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