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는 부모가 만든다

By | 2014년 9월 25일

고령화 사회와 핵가족 구조는 함께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고 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남자가 70세가 되지 못하고, 여자는 늘 그렇듯이 그보다 10년 정도 그 길었던 시절에 가족구조는 대가족 형태가 그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오늘날에는 주택보다는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이 선호되고, 그 안에 사는 가족의 구성 또한 핵가족의 형태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어느덧 고령화의 시대에 돌입했다. 고령화와 핵가족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싸가지가 없는 불효자식인가?를 생각해 보고 있다. 과연 그런가?

“왜 옛날 자식들은 부모님들 다 모셨는데, 그때보다 훨씬 잘 사는 지금 부모를 못모시냐?”라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많은 부분에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물론 모든 환경이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경우라면 굳이 이런 질문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옛날에는 부모와 형제들이 함께 살았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큰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돌보고, 작은 며느리는 밥을 준비했다. 세째 며느리는 아이들을 챙겨주었다. 물론 농사를 짓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평민들이 삶이다. 양반은 일을 해주는 일꾼들이 있었다. 만일 오늘날 부모를 모신다면 어떻겠는가?

슬픈 뉴스였지만, 가수 이특의 아버지가 모시던 부모와 함께 자살한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늙은 부모를 모셔야 했던 자식 또한 나이가 많았다. 혼자서 병수발을 하며 살아야 했던 시간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통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음이 분명하다. 힘은 부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가족 구조는 누군가 혼자서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데서 문제가 시작된다. 누군가의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가족이란 가족구성원의 희생을 요구하는 관계가 되어선 안된다. 함께 짐을 나누어져야 한다. 형제들끼리, 또 자식과 부모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가족이다. 그러나 주택의 형태나 가족구조가 지금의 형태가 유지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가족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고령화란 말에 그 뜻이 들어 있듯이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길어졌다. 즉, 부모를 모셔야 할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대신 모셔야 할 자식의 나이도 함께 올라갔다. 즉, 체력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3, 40대에 부모를 모시는 것과 5, 60대의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옛날 같으면 대접을 받아할 나이에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옛날 보다 훨씬 더 젊게 살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문화적 특성일 뿐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수준의 노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부양비용의 증가도 문제이다. 옛날엔 말그대로 하루 밥세끼면 충분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로 그렇게 되지 못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부양비용이 증가한 것이다. 옛날에 비하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지만 그만큼 비용이 넉넉하지는 않다. 따라서 자녀양육비와 부모부양비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세대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지금 부양을 받아 할 세대들은 스스로 자신의 노후를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노후에 써야 할 비용까지도 모두 자식들에게 퍼부었다. 자식들이 그만큼 자신들에게 되돌려 줄꺼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고령인구 중 72%가 자식에게 생활비를 의존하고 있는 반면, 미국의 경우는 1%만이 자식들에게 의존한다.

우리 사회가 노후대책에 대한 시스템을 만들지 못한 채 경제적 부강국가가 되어버렸다. 상대적인 빈곤층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빈공층 노인들도 양상하고 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정작 자신의 미래는 준비하지 못했다. 사회시스템도 어떠한 해답도 찾아주지 못했다. 지금의 고령인구들은 대부분 이런 실정이다.

가족은 관계이다. 세상에서 그 어떤 관계보다 친밀한 관계이다. 그 친밀함이 고형화사회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미리 연금을 준비해야 한다. 국가가 해주지 못한다. 젊은 사람들도 이제는 부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안받고 안준다”가 아니라 스스로 사회에서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관계는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소중한 관계이다. 따라서 서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되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부모들도 이제는 자식의 짐이 아닌 기쁨이 되어야 한다. 왜 자식만 부모의 기쁨이어야 하는가? 부모도 자식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로 기쁨이 되는 관계이어야 한다. 노력해야 얻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냥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내린 결론이 “효자도 부모가 만든다”라는 말이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즉, 지금 고령인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젊은 세대들이 부모를 버린 것도 아니고, 싸가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예전보다 부모 모시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자녀양육을 하는 것도 힘든데, 거기에 부모부양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인들이 자식을 생각해서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정신적인 부담까지 주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뭘 얼마나 부담을 주었다고?”고 반문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자식을 스스로 불효자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부모는 왜 자식의 기쁨이 될 수 없는가?

이런 이야기는 미래의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부모의 기쁨이 되는 자식도 중요하지만, 자식의 기쁨이 되는 부모도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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