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 美 처녀 간호사, 서서평(엘리제 셰핑) 이야기

By | 2012년 3월 18일

기사원본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18/2012031801599.html?news_Hea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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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조선일보에 난 기사를 읽어보면서 진한 감동과 도전을 받습니다. 출근해서 그 기사내용이 계속 떠올라 조선일보의 허락없이 인터넷조선일보에서 퍼옵니다. 사진과 기사내용 모두는 인터넷 조선일보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며 모든 저작권은 조선일보에 있습니다.

조선 땅에 몸던진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년
전라도·제주 병자 돌본 간호 선교사 – 광주서 과로·영양실조 숨졌을때 담요 반장·강냉이가루 2홉만 남겨
아이 14명 입양, 과부 38명 돌봐줘… 총독부 나환자 정관수술도 막아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 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 보고를 하던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양국주(63) 대표가 울먹였다.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의 미국인 서서평은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독신여성 간호 선교사.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을 이끌고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순회하며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큰년’ ‘작은년’에게 이름을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 여행을 나서면 말을 타고 한 달 이상 270㎞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할머니’ ‘큰년’ ‘작은년’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1929년 안식년을 맞아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1살 때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던 어머니를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된 선교사 생활로 가난이 몸에 밴 딸을 “니 몰골이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내친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렸으면서도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아이 14명을 입양해 훌륭하게 키워냈다. 과부 38명이 자립해 새 삶을 살도록 도운 것도 서서평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33년 그녀는 나환자들을 모아서 서울로 행진을 벌인다.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 결국 총독부는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한다. ‘나환자들의 어머니’라는 별명은 이때 생겼다.


◇장례 행렬 나환자들 “어머니” 부르며 오열

그의 장례는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 일간지는 당시 사설에서 “서 양은 생전에 ‘다시 태어난 예수’로 불렸다. 백만장자처럼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에 눈감고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그가 한국에 온 지 100년인 올해에야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의 ‘조선을 섬긴 행복’, 양국주 씨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상 Serving the People 펴냄) 등 평전 2권이 세상에 나왔다.

기념예배 참석자들은 인근 호남신학대 캠퍼스 언덕 위의 선교사 묘역도 방문했다. 서서평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가 서서평의 이끼 낀 묘비 앞에서 설교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원본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믿음의 원본을 되찾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 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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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에도 자료가 있어서 첨부해놓습니다.


 

한겨례신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523540.html


1912년 조선 선교사로 파견
전라·제주 나환우·걸인 돌봐
고아들과 한집에서 살다가
주검마저 기증하고 하늘로

성녀 테레사 수녀(1910~97)는 동유럽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나 18살에 수녀회에 입회한데 이어 1930년 인도의 빈민가로 파견돼 버려진 채 죽어가던 사람들을 돌봤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인’이 아니다. 하지만 인도의 권위지가 인도인 5만명을 대상으로, 간디를 제외하고 ‘역대 위대한 인도인이 누구냐’고 물은 설문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꼽혔다.

엘리제 셰핑(1880~1934·왼쪽 사진)은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지내던 중 개신교에 투신해 테레사 수녀보다 18년 앞선 1912년 3월 조선 선교사로 파견됐다.

그는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전신)와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창설해 이 땅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개신교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런 업적들만으로 그를 제대로 알긴 어렵다.

그는 전라도 일대의 나환우들과 걸인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집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병들어 생을 마쳤고, 자신의 주검마저 송두리째 병원에 기증하고 떠났다. 광주시에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엔 수많은 나환우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라 부르며 애도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와 달리, 우리나라에선 엘리제 셰핑도, 그의 한국명 서서평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내한 100돌을 맞아 그를 기리는 두권의 평전이 동시에 출간됐다. 양창삼(전 한양대 경영대학원장)·양국조(한인세계선교협의회 부의장) 형제가 각각 <조선을 섬긴 행복-서서평의 사랑과 인생>과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엘리제 쉐핑 이야기>를 펴냈다.

또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돼 오는 17일 오후 2시 광주시 백서로 기독간호대 오원기념각에서 기념예배가 열린다. 예배 뒤엔 두권의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식이 이어진다. 평전엔 저자들이 사장될 뻔한 옛 선교사들의 자료를 발굴해 되찾은 사실감 있는 자료와 사진들이 가득하다. 양국조 부회장이 지난 2년 동안 모은 12만여점은 한국 개신교 역사를 정리하는 데도 긴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서평이 활동했던 광주·전남은 1930년 45만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굶주리는 인구가 무려 88만명, 걸인이 1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서평은 1년 가운데 100일 정도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서서평의 당시 일기엔 “한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시대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서서평은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 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자존감을 살리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만~4만여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일깨웠다.

그는 한 나환우가 역시 나환우였던 아내가 죽자 병든 자신이 더이상 키울 수 없어 버리려던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아이 14명을 양아들·양딸로 삼았다. 소박맞거나 오갈 데도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1926년 이 땅의 한 매체는 서서평 인터뷰 기사에서 그를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서서평이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추모했다. 메리 슬레서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 버려진 어이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이다.

또 1930년대 미국 장로회는 전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했다.

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맡에 걸려 있던 좌우명을 보았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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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기사들 모음…

전북중앙일보 http://www.jj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6652
뉴스파워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7613&section=sc4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18/2012031801316.html?news_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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