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설교 by 하용조 목사, 1997

By | 2017년 10월 19일

[출처 : 온누리TV 자료집]

설교에 따라 성도와 교회가 달라진다

예배가 교회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서 예배가 잘 드려지면 심장이 잘 뛰는 것과 같습니다. 심장이 잘 뛰면 모세혈관에까지 공급이 잘되는 거죠. 병이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피만 순환이 되면 다 회복이 되는 거예요.병이라는 게 뭐냐 하면 혈액순환이 잘 안되기 때문에,가야할 곳까지 못가면 괘사가 되는 거죠.

예배가 잘 드려지면교회 부분부분 구석구석까지 살아납니다. 설교는 예배의 심장과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예배가 살아납니다. 물론 찬양을 많이 불러도 예배가 되고,기도가 많이 돼도 예배가 되지만 그 예배의 KEY는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죠.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렇죠? 하나님은 육이 아니세요. 시간과 공간 안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세요.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그 임재를 어떻게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을 느끼는 거죠.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외우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죠.

말씀은 말씀 그대로 전달이 안돼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만 우리가 느끼고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있어서는 말씀의 사역보다 더 중요한 사역이 없고 목회자의 부름은 말씀으로의 부름이예요. 제일 중요한 것이예요. preaching, 이 말씀은 교회를 만듭니다. teaching은 교인을 만듭니다. 이 preaching과 teaching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설교를 하느냐가 어떤 교회를 만드느냐를 결정합니다. 여러분의 그 설교 속에는 여러분 교회의 비전도 있고 색깔도 있고 그 림도 있고 크기도 있어요.

여러분이 어떻게 성도들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성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teaching은 preaching이 아니예요. 달라요. 이 teaching과 preaching은 다른 거예요. 이 teaching, 가르치는 것과 preaching을 같이 겸하는 분이 있으세요. 그러나 어떤 분은 preaching은 잘 안되는 분이 있어요. teaching은 잘 되는 분이 있어요. 그러나 설교는 teaching이 아니라는 것이죠. teaching이라고 말할 때는 이런 정보 전달의 개념이 더 강한 것이고, preaching은 선포의 개념이 더 강한 것이죠.

그래서 가끔 설교할 때 보면‘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그러면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게 아니예요. ‘그렇습니다’예요. proclamation 선포하는 거예요. ‘회개하십시오’ 이렇게 해야지‘회개하시면 좋다고 생각합니다’이건 아니죠. 설교란 들리는 만큼 모입니다. 여러분의 교회 사이즈는 어떤 면은 목사님의 몫이예요. 교회 사이즈는. 누가 그래요. 교회의질은 장로님의 몫이다. 그런 말을 하고요.교회 사이즈는 목사님의 몫이다. 다 그렇게 설명할 수 없지만 일리가 있는 얘기하고 생각합니다.

설교가 들리는 만큼 사람이 모인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굉장히 성실하다고 장사가 잘되지는 않아요.실력 있다고 장사 잘하는 것 아니예요. 굉장히 성실하고 실력이 있어도 목회가 안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사이즈 가지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사이즈 가지고 여러분의 인격을 결정하지 마세요. 작을 수 도 있고 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해요. 목회를 잘 하려면 길목을 잘 잡아라. 이런 얘기. 그런 장사가 아니라는 말이죠. 교회는. 자꾸 너무 세속적으로 세상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이죠. 세상은 이 물량주의적으로 모든걸 결정하기 때문에, 저는 오늘 아침에 조성록 장로님의 간증을 통해서 제가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비록 교인이 10명이라도 그 고통스러운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게 은혜요 축복이라고, 그리고도 계속해서 6년 동안 버텼다는 것, 이게 기적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하나님은 누구를 더 칭찬하시겠어요? 교인이 많다고 사역이 많다고 하나님은 그를 높이 점수 줄까요? 안 그래요. 많아도 진실하면 상 주실 것이고, 그런 거예요.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설교의 gift를 하나님이 준 분이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하나의 gift다. 그래서 설교는 은사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어떤 분은 얘기하면 똑같은 얘기라도 재미있게 얘기하는 분이 있고,간결하게 얘기하는 분이 있고 그렿습니다.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어떤 사람 설교 들어보면 빤한 설교가 있어요.한 서너 번 들어보면 빤한 거예요. 빤하면 졸지요. 뭐가 이렇게 기대감이 있고 다음에 무슨 얘기 하지?그래야 듣지요.

이번 주 설교 끝나면 다음주 빨리 와야 되는데, 설교는 어떻게 보면 연속극 같더라고요. 빤히 아는 얘기죠. 연속극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다 아는 얘기면서도 그러나 연속성을 가져요. 그 드라마도 기승전결이 있어요. 거기에 웃음도 있고 흥분도 있고 기쁨도 있고 감격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 드라마 끝날 때는 다음 드라마 안보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모래시계 같은 게 끝날 때는 서울 장안이 다 한가했잖아요?그러나 봐야하니까.여러분의 설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설교 끝나자마자 그 다음 설교 들어야 되는 거예요.그러니까 설교는 단회적이면 안되겠죠.오늘은 이 설교 다음주는 이 설교,신약 구약 왔다 갔다 하면 일년 지나고 나서 보면 무슨 설교 했는지 몰라요.드라마처럼 이렇게 연속성이 있어야 돼요.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단회성이 있어야 돼요.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고 그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고,그래서 여행도 못가요 그 설교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그거 빠지면 큰 일 나니까.설교를 들을 때 사람들의 주먹이 쥐어져야 해요.가슴이 두근거려야 되고, 흥분이 되고 눈물이 나고,끝나자마자 그래 오늘 나는 나를 바꿔야 돼,그러고 이렇게 끝나야 되지않겠습니까?

설교는 들리는 것만큼 사람이 모이는 법이죠. 서울에서 설교하셨어요. 여러분의 설교 테이프가 미국까지 가면 여러분의 성도는 어디까지 있어요?미국까지 있는 거죠. 장소는 별 의미가 없어요. 이제 테이프로 다 돌아다니니까. 설교는 예배의 심장과 같다고 그랬어요. 따라서 설교가 살아있으면 생명력이 있으면 설교에 성령이 기름 부으시면 예배전체는 살아나게 돼 있어요. 조금 성가대 잘 못해도 조금 어수선해도 말씀에 은혜가 있으면 살아나게 돼 있어요.

설교는 몸 안에 들어와야 한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좋은 걸 하나 배웠어요. 설교를 잘하면 뭐든지 다 용서해요. 그러나 설교를 잘 못하면 용서 안 해요. 그게 설교더라고요. 설교를 하면 교회 전체가 다 이렇게 은혜의 단비를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여러분의 설교에 기름 부으심이 있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설교에 능력을 얻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설교가 살아 움직이기를 축원합니다.나는 이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여러분이 설교자가 아니었으면 몰라도 설교자로 하나님이 불러주셨으면 죽을 각오를 하고 뚫으십시오.

우리 하용인 선교사님 경배와 찬양하는,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초청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영어도 그렇게 능숙하게 하지도 못하고 사역도 시작할 때죠.그런데 제가 하용인 선교사한테 배운 게 있어요. 빌리그래함 설교를 통째로 외우더라고요. 좋은 설교는 그것을 놓고 외워서 그러니까 통째로 외우니까 제가 그 노력에 감동을 했어요. 그래서 하선교사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사역을 하잖아요. 왜? 그 때 그렇게 하더라고요. 그 정도로 열심히 합니다.

하여튼 설교는 몸 안에 들어와야 돼요. 머리 안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몸 안으로 들어야 돼요.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몸 안에 들어온 얘기는 언제 어느 때나 나와요.원고 필요 없어요. 스위치만 틀면 나오는 거예요.똑 같은 설교를 5분에 할 수도 있고 1시간에 할 수도 있고 하루 종일 할 수도 있어요. 몸 안에 완전히 설교가 들어와 있어야 되지요.

설교는 죽은 영혼을 살린다

여러분 설교는 죽은 영혼을 살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여러분 제가 설교할 때는,사람의 이성에 호소 안 해요.이성이라는 과정이 필요하죠. 논리적인 설교를 하면 사 람들이 듣지요.논리가 없으면 안 들어요.한 얘기 또 하고 이 얘기 했다 저 얘기 했다 그 러면 잘 안 들어요. 그러나 제가 설교를 할 때는 그 사람의 영에 설교를 하지 이성에 호소 안 한다고요.

영에다 설교를 하면 죽어있는 영혼들이 살아나는 것이 보여요.얼굴에 그게 나타나요.들어올 때는 죽은 얼굴이었다가 설교 들으면 산 얼굴로 나간다고요.너무너무 좋 아한다고요.그건 이성이 설득된 것이 아니예요.내 영이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골수와 관절을 쪼갠다는 말이죠. 영이 살면 육이 살아요. 따라서 여러분 육을 기쁘게 하는 설교나 인간의 혼을 기쁘게 하는 설 교는 그것으로 끝나버려요.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나 spirit 영을, 영으로 설교하고 영에게 설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설교는 incarnation

저는 빌립보서 2장 6절의 말씀을 통해서 설교에 대한 네 가지 기본적인 얘기를 먼저 나누 고 싶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 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걸 설교학적으로 설명해보고 싶어요.

설교란 incarnation, 그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인간 과 같이 된 것을 가리켜 ‘성육신’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거 아닙니까? 설교란 그런 거예 요. incarnation.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몸 안으로 incarnate 되어야 돼요.

첫째 incarnation, 성육신이 되는 게 설교예요. 그래서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말씀이 통째로 내 몸 안에 육신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서 내 이성으로 내 언어로 내 몸으로 내 삶으로 이 설교가 표현되어야 해요.절규하는 사람이 원고보고 절규하는 것 봤어요?아 주 한이 맺히는 사람, 이혼당하고, 매 맞고 쫓겨나고 이런 사람보고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오 이러면 두 시간 세 시간 거품 물면서 이야기해요, 너무 분해서. 그게 설교예요. 예수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데 어찌 흥분을 안 합니까? 어떻게 그렇게 맹숭 맹숭하게 그 얘기를 해요?그것도 기적이지.아니 어떻게 교인을 졸게 해요? 그것도 기적이 지.복음을 가지고 말이죠.한이 맺힌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젖어버린 사람들 은 십자가 얘기만 하면 흥분하는 거예요.원고가 어디 있어요?쏟아지는 거예요. 막 쏟아지 는 거예요. incarnation됐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설교가 incarnation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incarnation되었다는 말은 뭐예요? identification,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나와 동일화가 되어야 해요.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어요.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두번째는 그 예수님이 인간과 identification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도 잘 알지만 인간 도 잘 알아요.설교자는 두 개를 잘 알아야 돼요.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해야 돼요.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되고 동시에 인간을 알아야 돼요. 그런데 목회자들의 약점은 인간을 너무 일방적으로 한 부분만 안다는 것이예요. 여러분 텔레비전 설교 왜 하세 요?신문설교 왜 하세요?신학교 졸업하신 분들은 설교가 굉장히 어려워요. 왜 신학적인 용어를 쓰세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목사님들이 번역식 설교를 합니다. 매일 번역된 책만 읽어서 한국말을 못하는 것처럼 영어를 한국말로 번역해 놓은 것, 이상한 문법을 쓴다고 요. 그래서 전달이 안돼요.그냥 콩나물 장사가 얘기하는 것 같이 시장바닥에서 보통 얘기 하듯이 그런 아주 생활적인 얘기를 써야지 설교는 문어체 쓰면 안돼요. 구어체 써야 돼요. 그냥 생활언어,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는 것, 예화도 그래 요. 1800년대 나폴레옹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오늘 개똥이 엄마가 겪었던 것. 그 런 거예요. 오늘 내가 설사 나서 생겼던 것, 밤 잠 못 잤던 것, 특별히 사람들은 설교를 할 때 피상적인 설교를 해요. 그렇지 않아요. 설교는 인간의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돼요. 사람들은 자기 내면 속은 다 감추고 있거든요. 그 인간의 허구성, 위선, 죄성, 비밀히 여기 는 어마어마한 세계예요. 그 세계를 예리하게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가지고.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냐하면 캄캄한 방에 전기 불을 들고 찾아가는 것과 똑 같아요. 이 문 열어보고 저 문 열어보면 거기에 인간의 질투, 간계, 인간의 두 얼굴, 인간의 욕심, 인간의 음욕, 인 간의 위선 이런 것들이 얼마나 멋지게 포장되어 있는데,그걸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

자, 하나씩 하나씩 풀면 까무라치게 놀라죠.그럼 뭐라고 그럴까요? 목사님이 내 얘기하지 그런다고요. 내가 언제 당신을 아오? 모르죠, 그런데 왜 그게 내 얘기처럼 들리느냐? 내 속의 비밀을 파헤쳤기 때문에,그 내 속의 비밀은 나의 비밀이죠. 내면을 파고 들어가야죠. 겉에는 불을 켜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 안에는 다 전기불 끄고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 고 껍데기,요즘 대선이 어떻고 뭐 요즘 이러면 됩니까.. 그건 내가 안 해도 신문이 다 했다 니까요?그 소리를 왜 또 해요? 여러분은 텔레비전 해설가가 아니라고요. 정치해설가도 아니고 경제해설가도 아니예요. 조심하세요. 여기는 전문가들이 다 앉아있다고요. 정치 얘기 함부로 하지 말고 경제 얘기 함부로 하지 말고 신문 좀 읽고 어디서 얘기 좀 읽고 그랬다고 말이죠. 우리한테는 새로운 지식이지만 여기 앉아있는 분들에겐 다 구지식, 너무나 나 보다 잘 아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내가 전할 수 있는 메시지는 성경 밖에 없어요. 성경 외에 넘어가지 마세요. 이게 우리의 전공이고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예요. 왜냐하면 이 성경은 작은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까지 연결되어 있거든요. 세상의 지식은 세상에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그리고 천국까지 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 은 박사 아닌 박사 할아버지라도 세상의 어떤 전문가라도 이 말씀은 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이런 설교자의 영적권위와 확신과 confidence 자신감이 있을 때 이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자신감이 있으면 말이 쉬워집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말이 어려워집니다. 제가 하나 배운게 있어요.

설교준비 안하면 말 tone이 높아집니다. 괜히 소리를 지릅니다. 준비 많이 한 사람은 소리 지를 것 없어요. 또 설교자가 피곤하면 안돼요. landing이 안돼요. 왜 설교 자가 한 소리하고 또 하는지 아세요? 상대방이 못 알아들었을까봐. 그러니까 한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는 거예요.한  소리 한번 하면 설교고 두 번하면 잔소리예요. 설교를 잔소 리로 만들지 마세요. 설교는 말이죠, 비행기가 landing을 잘 해야 돼요. 자꾸 활주로를 돌면 안돼요.그냥 착 내려야 해요.서론이 길면 안돼요. 설교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cut해 내느냐가 중요해요. 나무 있죠? 위대한 농부는 사정없이 자르는 거예요. 자르는 건 아픈거예요. 왜냐하면 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지를 다 쳐버려야 해요. 그래야 그 가지가 다 살아나는 거예요. 이것저것 다 주면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메시지가 안돼요.

Incarnation, 설교는 incarnation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됐다. 하나님이 사람이 됐다. 예수님 이 인간과 identification되었다. 그러면 identification되었다고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뭐 냐? communication이예요. 사람처럼. 말씀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게 identification이예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 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래서 사람과 communication한다 이거죠.

설교는 communication이다. 전달을 해야 돼요. 좋은 설교가란 유능한 communicator예요. 내가 설 교준비를 다 많이 했어도 어떤 상황에서는 이 설교를 포기할 용기가 필요해요. 그게 설교예 요.지난번에 어떤 분께 제가 아주 기분 좋은 소리를 하나 들었어요. 그 분은 미국에서 학위 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신 분이예요. 미국에서 온누리교회를 소개받고서(자기 교회를 한 3,4년 다녔는데) 온누리교회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서울에 왔대요. 1년 반이 되도록 나하고 손 한번 못 잡아 본거에요.그러니까 미국이 그리웠겠죠.거기는 교제 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는데,좋긴 좋은데 사람이 하도 많고 저를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목사님 제가 1년 반 만에 잡아보는 손입니다.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분이 저에게 이런 격려의 말을 해주더라고요. 저는 1년 반동안 목사님 손은 못 잡았지만 여기 설교 때문에 내 가 여기 붙어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목사님이 1년 동안 굉장히 고난을 받 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는데 목사님이 한번도 변명을 안하시고 똑 같이 웃으시면서 설교를 하는 걸 볼 때 진짜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1년 동안 변명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자기는 진짜 설교를 들었다. 그렇게 저를 격려해 주더라고요.

설교는 내가 말하는 것도 설교지만 내 삶이 설교예요. 이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사기꾼이 될 수가 있어요. 설교가 나빠서 사람이 안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와 설교자의 삶이 서로 연 결이 안 되기 때문에 좋은 설교를 들을수록 갈등을 하는 거예요. 이 설교는 communication 이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오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같이 밥을 잡수시고 같이 잠을 자고, 사람하고 똑같이 살았단 말이죠 .피곤하셨고 목마르셨고 주무셨고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communication 됐다.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시고, 만일 예수님이 폼 잡고 앉 았으면 제자들이 따랐겠어요? 안 따랐겠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셨기 때문에 진짜 communication이 된 거예요.

여러분, 목회자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교인들하고 얼마나 communication이 되어 있으세요? 마음과 마음, 삶과 삶 비록 여러분들은 목사이고 설교자이지만 교인들이 느끼기에는 저분은 내 친구다 이렇게 느껴야 돼요. You are my friend, you are my brother. 이런 느낌이 있어야 돼요. communication이 되어야 해요. 사람들이 점치러 가요. 그러나 자기 점치러가고 굿도 하지만 자기 자식을 무당으로 만들겠다고하는 부모는 없어요. 점은 필요해서 치는데 그러면 내가 점쟁이가 되겠냐?no. 여러분들의 교인이 목사가 되고 싶어해야 돼요.나는 목사가 제일 좋은 것 같다. 그 정도까지, 교인들이 나는 우리 자녀가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까지 말이죠. 다 해도 나는 목회자는 싫다 이러면 안 돼죠. 그 목사는 문제있는 거예요. 모델이 안 된 거죠.

이 설교는 이런 의미에서 identification이고 communication이예요. 그리고 설교는 마지막 sacrifice, 십자가에 죽기까지 설교자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가 보이거든요. 희생이 없는 사람에게는 희생이 안보입니다. 낮은 데로 가면 예수가 보입니다. 손해보면 예수가 보입니다. 희생하면 예수가 보입니다. 그렇게 말도 안되는 핍박과 고난을 겪고도 가만히 있으면 예수가 보여요. 결국은 설교란 예수님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연세대학교 다니는 교수가 한분 계신데, 그 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셨어요. 미국에서 오신 분인데. 우리교회 등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시더라고요. 서울에 내놓으라 하는 교회는 다 갔대 요. 왜냐하면 자기도 정착을 해야하니까. 이 설교 저 설교 다 들어봐도 잘 모르겠더래요. 그래서 부부가 이런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는 설교가운데 예수님 얘기를 제일 많이 하는 설교자를 찾아가자. 그러고 그런 기준을 세우고 설교를 듣기 시작했대요. 그래서 큰 교회를 다 갔대요. 웬일인지 제가 설교 하면서 예수님 얘기를 많이 했나봐요. 여기오니까 처음으로 설교에 예수님 얘기가 있더래요. 그래서 이 교회를 결정했습니다 하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설교의 시작도 예수님이요. 끝도 예수님이예요. 결국은 설교시간에 보여지는 것은 나의 위대한 웅변이나 논리나 아주 sharp한 지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서 끌게 하는 게 아니예요. 나는 폴 텐리 같은 사람의 설교를 들어보면 굉장히 sharp한 이 시대를 꿰뚫고 보는 그런게 있어요. 그런데 과연 그 속에 예수님이 있느냐? 그건 별개의 문제더라고요. 사람들이 본 회퍼나 이런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이 거기 다 빨려들어가요. 위대한 사상가이니 까.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고 예리한 지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소박할지 모르지만, 따뜻한 그리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격려해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항상 거기 있어야 돼요. 이게 설교예요. 결국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두 번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설교 이전에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길러라. 이건 아주 모든 설교자에게 중요한 테마가 됩니다. 설교란 말씀을 전하는 것이죠. 다른 말로하면 말씀에 젖어 있어야 돼요. 술꾼이 술통에 빠지듯이 목사는 말씀에 빠져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어떤 주제를 말해도 어떤 책을 말해도 튀어 나와야 돼요. 여러분 4복음서가 뭐예요? 예수님의 생애를 마태의 각도에서 마가라는 각도에서 누가라는 각도에서 요한이라는 각도에서, 네 군데, 동서남북에서 본 것이 4복음서 아니예요? 이 앵글이 다르면 보는 게 달라요. 앞에서 보는 사람들은 내 정면을 묘사할 것이요, 내 뒤에서 보는 사람들은 내 뒤통수를 묘사할 것이요. 그게 예수예요. 성경을 이런 여러 가지에서 조명하는 거예요. 그렇게 보다보면 어떤 사람은 귀를 묘사했지만 그것도 예수요, 어떤 사람은 코를 묘사했지만 그것도 예수요. 눈을 묘사했지만 그것도 예수요, 뒤통수를 묘사했지만 그것도 예수라는 얘기죠.

성경이라는 것은 이렇게 망원경식으로 보기도 하고 현미경식으로 보기도 하고 숲으로 보기도 하고 나무로 보기도 하고, 다양하게. 역사적으로 보기도 하고 인물별로 보기도 하고, 주제로 보기도 하고, 적어도 목사는 약해지면 안돼요. 이 부분에 대해서만, 꿰뚫어야 된다. 성경을 꿰뚫어야 된다. 그러니까 한 가지 방법이 아니예요. 이렇게 봐도 되고 저렇게 봐도 되고, 위로 봐도 되고 아래로 봐도 되고, 어떤 본문이 나와도 툭 잡아야 돼요. 우리가 약한게 그거예요. 우리는 신학교 3년 시절에 너무 신학책만 봤다고요. 신학이 꽉 차있어요. 그런데 꽉 차있는 만큼 빼내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려요. 이걸 다 세트하고 빼내야 돼요.그 책은 다 읽어야 돼요. 신학은 도움이 되는 거예요. 중요한 거예요. 그러나 성경이 더 중요해요.

성경을 들고 파라는 거예요. 간단해요. 그냥 읽으면 돼요.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이렇게 읽고 저렇게 읽고 여러 가지 각도로 읽는 거예요. 우리 유진소 목사님이 인물별 성경공부를 40일짜리를 만들었는데, 그것 참 좋아요. 이때까지 했던 인물별하고는 달리 새로운 각도로 했어요.그것도 하나의 통찰력이예요. 이때까지 것들은 하나의 information을 중심으로 주는 거예요. 어디서 태어났고 언제 어느 때에 했고 배경은 무엇이고 그 인물은 아버지 어머니 누구이고 이렇게 다 인물별 한다고요. 그런데 유진소 목사님이 만든 인물별은 그렇게 안 했어요. 내적치유로 했더라고요. 하나님 만난 사람은 다 상처가 있더든요. 하나님이 어떻게 그 사람을 치유해 주셨나 이런 각도로 보니까 이거 할 때마다 사람들이 치유가 되는 거예요. 야곱이 받은 상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서 어떻게 치유가 이루어졌는가?

그러니까 성경공부 방법도 늘 우리가 하는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아주 전혀 다른 앵글에서 접근해 줄 수도 있다고요. 제가 지금 토요일에 열린 예배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하는데 지금까지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위한 요한복음 공부를 했어요. 그러나 열린 예배에서는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제하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요. 이 앵글이 다르더라고요. 접근법이 다르고. 성경은 이렇게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드라마로 도 생각을 하고 내적치유로도 생각하고 스토리로도 생각하고, 이렇게 스터디하는 거예요. 특별히 바울서신 같은 경우는 문장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단어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현재 형이냐 현재분사형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구약은 스토리텔링 아닙니까?

어쨌든 제가 얘기하는 것은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것, 묵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깊이는 묵상의 깊이이다. 왜 우리의 설교가 화려한데 은혜가 안 되느냐? 묵상이 없기 때문이다. 깊은 묵상으로부터 나오는 설교는 사람이 들으면 금방 알아요. 옷도 비싼 옷하고 싼 옷보면 딱 알잖아요. 좋은 옷은 뭔가 좋아요. 선이 다르고 질감이 다르고 패션이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오리지널하고 카피는 다르다니까요. 설교 딱 들어보면 야, 저거 쉽게 말하는데 쉬운 게 아니구나 그래요. 깊이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단순하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격이 있구나, 저 사람은 무슨 철학자 얘기도 안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안해도 아 저 사람은 저 책을 다 읽었나보다. 말은 절대 안 해요. 그런데 보면 철학을 뚫었구나. 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아는 사람은 아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되어야 돼요.

절대로 다른 유명한 사람 말 인용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고요. 성경의 설교의 깊이는 묵상의 깊이이다. 그러면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묵상은 하루아침에 안돼요. everyday, 날마다. 조금씩 깊이. 그게 묵상훈련이예요. 저는 설교훈련의 가장 기초는 묵상훈련이라고 생각해요. 묵상훈련은 침묵 훈련이예요.소가 풀을 먹고 되새김질 하는 것과 똑 같아요. 우선 막 먹죠. 그 다음에 저 쪽에 한 곳에 앉아가지고 태양이 비취는 곳에서 윽~하면 또 개어가지고 씹다가 꿀꺽 삼키고 또 한참 있다가 윽~하고 또 씹고 또 꿀꺽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설교예요. 이런 과정. 저는 데니스 레인 목사님을 만나서 설교를 배운 사람 중에 하나인데, 늘 만날 때마다 어떻게 똑같은 본문인데 저렇게 설교를 하나 생각이 드는거예요. 그분은 30년 동안 큐티를 했거든요. 목사님의 설교자의 제1과업이 큐티예요.

우리 두란노에 생명의 삶이 있고 말씀 묵상이 있어요.오늘 말씀 묵상 다 신청하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말씀묵상은 나를 위해 만든 책이예요.생명의 삶은 누군가를 떠다 먹이는 거예요. 누군가 말씀 묵상한 것을 그러니까 초신자들은 생명의 삶이 좋아요. 다 만들어지고 예화가 있으니까. 생명의 삶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냐, 보니까 본문 때문이 아니라 예화 때문에 좋아하더라고요. 그거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음식 떠먹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자기가 만들어 먹는 거예요. 그래 서 영어 본문주고 주석주고 본문주고 빈칸 줘요.당신이 생각하라 이거예요.저는 그런 노트가 필요해요. 그래서 사실은 말씀묵상은 제가 필요해서 만들었는데 혼자 쓰기 아까우니까 그냥 잡지로 만들어서 모든 목사님한테 나눠준 거예요. 그걸 매일 하는 거예요.저는 그 새벽기도를 어떻게 하냐?그 말씀묵상을 가지고, 설교형태는 아니예요. 새벽기도는. 저는 큐 티에 설교까지. 제가 하는 설교는 큐티식 설교예요. 큐티와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설교자로서 좋아하는 목사님이 이동원 목사님이예요. 그분은 설교를 굉장히 강해설교학적으로 완벽하게 하세요. 저는 좀 달라요. 저는 좀 큐티식 설교예요. 그래서 새벽마다 제가 큐티한 내용들을 툭툭 던져줘요. 그리고 적용을 시켜요. 그렇게 매일하기 때문에, 오랜 습관이 됐기 때문에 어떤 본문이 나와도 큐티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그렇게… 몇절 몇 절 몇절. 어떤 때는 너무 많이 나와요.그 래서 설교를 하려면 몇 개를 잘라야 돼요. 걸러야 돼요. 그래야 그 청중에게 주는 메시지가 나타나거든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지금까지 큐티를 잘해오신 분들에게는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만 아직 이런 부분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은 큐티 특히 묵상하는 말씀을 가지고 적용에까지 끌고 또 그것을 하루아침에 안되니까 끊임없이 할 것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목사님의 가장 큰 축복은 새벽기도라고 생각해요 교인들은 . 안나오고 싶으면 안 나와도 되잖아요. 목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나와야 돼요. 새벽기도 안하는 날은 제일 행복한 날 아닙니까?하는 날은 더 행복한 날이예요.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everyday 묵상, 새벽기도는 결국 묵 상이예요. 묵상된 말씀을 그 신령한 아이디어들을 그때그때 자꾸 던져주는 거죠. 그러다보면 적용하는 훈련이 자기도 모르게 자꾸 되고 말씀을 보고 뽑아내는 훈련이 되는 거예요.

대개 목회 2,30년 하신 분들은 웬만한 주석은 다 읽지 않았어요? 뭐 한번쯤 읽어야 되겠죠. 웬만큼 대충 되지 않습니까?그 다음부터는 주석은 나를 방해해요. 왜냐하면 고정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그 이상 생각을 못 넘어가게 만든다고요. 주석이라는 것은 내 생각이 맞았나 안 맞았나를 검증해주는 하나의 울타리같은 역할을 해줄 수는 있지만은 말씀은 성경 하나면 되요. 적어도 목회를 설교를 10년 정도 했다고하면 웬만한 책, 주석은 다 읽으셨을 거예요. 메인 메시지는 성경하고 싸워야 돼요. 일대일로.

어떤 분들은 제게 그런 질문하는 분들이 있어요.목사님 어떤 주석을 참고합니까? 제가 지난번 까지도 켐벨 몰건 좋아하고 존 맥커도 좋아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 주석을 참고했습니다만 요즘은 그런 분들의 주석도 한참 보니까 그게 그거더라고요. 결국은 내 교인들에게 내가 주는 메시지는 내가 찾 더라고요. 내 새끼한테 먹일 음식은 내가 알아요. 그건 성경에 있고, 제일 좋은 예화는 성경 에 있어요. 성경에서 성경으로 성경에서 성경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교인들이 설교 듣는 귀를 만들어요.그 말씀 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주로 토요일 같은 때는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설교준비를 대충하면 제 아내에게 practice를 합니다. 그게 토요일 저녁의 제 시간이예요. 원고없이 서론은 이렇게 잡았고 본론은 이렇게 잡았고 결론은 이렇 게 잡았고 이렇게 이렇게 한다 그러면 여자는 센스가 있어요. 남자보다. 그래서 그걸 딱 잡 아내요. 가지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또 이건 너무 하나에 치우친 것 같다. 그런 코멘트를 받 을 수가 있어요. 목사의 설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분은 불가능합니다. 잘못했다 말해도 어렵고 잘했다 말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부인이 제일 좋아요. 부인에게 설교를 검증 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서 부인으로 하여금 설교를 도와줄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약점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인이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적해주면 자존심이 상해서 안돼요. 어려워요. 그래서 여러분의 사모님들을 설교를 잘 평가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일이 또 참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게 또 안되는 분은 포기하세요.

그러며 묵상된 메시지 말씀을 어떻게 설교로 끌고 갈 것이냐? 결국은 설교란 내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예요. 그래서 설교를 듣고 나면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이런 인상이 있어야 해요.가능하면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야 해요.그러니까 너무 설교를 화려하게 하면 누 가 나타날까요?그 사람이 나타나죠.말 잘하네 이런 말 들으면 안돼요. 와~ 저사람 화술 좋다 이래도 안돼요. 하나님이 생각나야 되고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 설교죠. 묵상된 말씀을 설교까지 어떻게 그것을 인도해 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설교를 위하여 본문에 나타나는 구절을 분석하고 뼈대를 만들어라.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가 은혜로운데 뼈대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심이 안잡혀 있다는 말이예요. 살을 다 빼고 나면 뼈가 남죠.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 수인들인데 수인들은 설교를 하고나면 그걸 성경공부 교제로 만들어요. 여러분의 설교를 성경공부교제로 만들어 보면 설교에 내용이 있나를 검증할 수 있어요. 얼마나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얼마나 논리가 있는가? 이것은 교제를 만들어보면 여러분의 성경공부가 내용이 있나 없나를 알 수 있죠. 어떤 사람들은 내용도 없는데 은혜를 끼칠 수가 있어요. 그걸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설교를 하든지 뼈대가 있고 구조가 있고 서론, 본론, 결론이 있고 visical하고 referance가 잘 정리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주요 과정을 철저하게 추적하라. 이것을 뛰어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나 단어용어 라든지 히브리말을 저는 설교에서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히브리말에 의하면 조엔은 무엇이 고 비오스는 무엇이고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그런 얘기 할 필요가 없다.그 냥 자기가 알면 되고, 정확한 그 내용을 설교에 쉽게 적용해서 말해주면 되지 내가 이만큼 알고 있다는 지적과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너무나 많은 초신자들은 목사님 설교를 못 알아 듣겠다는 거예요. 설교는 성경을 해석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설교를 또 해석해 줘야 되는 거예요. 다음으로는 그 뼈대에 묵상된 메시지를, 살을 입혀주는 거예요. 그리고 필요한 예화를 삽입하고 삶에 적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청중들이 설교를 듣고 이런 반응이 있는게 좋아요. 오늘 설교가 내 설교 같다든지 그 설교가 내 가슴에 닿았다. 그 말이 중요해요. 머리에서 나온 설교는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해요. 가슴에서 나온 설교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해요. 머리에서 나온 것은 지식이예요.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아요. Heart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어떤 한 여자를 사랑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보니 아버 지도 좋고 어머니도 좋고 배경도 좋고 직업도 좋고 건강하고 잘 생기고 다 있어요. 그런데 뭐가 움직여야 돼요? 가슴이 찡해야 되는데 아주 잘 생겼고 배경 좋고 반들반들하고 누가 봐도 좋은데, 가슴에 감동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럼 결혼 못하는 거죠. 그것 가지고 결혼 하는 게 아니거든요. 좀 못 생기고 부족하고 그래도 어쩐지 그 사람이 좋다. 꿈에도 보이고 난 저 사람하고 살아야 돼.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논리가 안 서요. 그래서 그게 있으면 결혼하려고 한다고요. 똑같아요. 설교에는 하나님의 heart를 심어줘야 돼요. 하나님의 가슴 하 나님의 마음 이런 것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든 설교자들이 연구해야 될 설교가 강해설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목 설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본문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합니다. 조직신학적인 설교는 조심해야 합니다. 강해설교란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한 설교로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해석하여 오늘의 상황에 정확하게 적용하는 설교를 강해설교 라고 말하죠. 실제적인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말씀에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을 맺어라.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을 맺어라. 설교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아니다. 똑같은 소리예요. 두 번째 설교는 쉬워야 된다. 여러분의 설교는 기준이 있습니다. 중3이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생이 들으면 안돼요. 텔레비전 방송을 해보면 PD가 입이 닳도록 연출하는 사람한테 특별히 목사한테 하는 얘기가 있어요. 청중은, 여기 관객은 중3입니다. 중3이 알아듣게 해주십시오. 왜냐하면 목사는 항상 어려운 말만 하니까 텔레비전 앞에 서면. 여러분 우리들의 관객은 중3정도가 알아들을 수 있게, 그리고 enjoy 할 수 있을 설교를 해야 돼요. 그러나 그의 설교의 깊이는 지성인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설교는 쉬워야 된다. 여러분 소위 대형교회라는 교회가운데 어려운 설교 들어본 적 있으세요? 없죠. 만약 그렇게 그가 설교를 어렵게 했다고 한다면 청중은 그렇게 안 모였을 거예요. 그 다음에 설교는 실제적이어야 된다.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여야 한다. 공허한 이야기, 철학적인 얘기는 안 된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이어야 한다.예 수는 내 삶 속에 있다. 실제적이다. 밥하는 것도 상관있어야 하고 빨래하는 것도 상관있어야 하고 애 키우는 것도 상관있어야 되고 그게 설교예요. 그 다음, 적용이 없는 설교는 열매 없는 나무와 같아요. 적용이 가능해야 된다. 그날 듣고 적용이 되어야 해요. 성령님에게 민감하라. 가슴에서 나오는 설교를 하라.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저는 여러분의 설교에서 큰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성령의 기름이 흘러넘치기를 바라고 축복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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