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가지 생각들

By | 2019년 9월 18일

요즈음 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집중력이 상실되고, 어떤 사안에 대하여서는 편집증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글로 지금의 생각을 적어두어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볼 수 있게 하려고 글을 적는다. 순전히 기억용으로 말이다.

한국교회가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성도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대형교회들의 전횡은 이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문제의 중심에는 목회자가 자리잡고 있다. 가짜 목사, 사기꾼 목사, 삯꾼 목사들이 바로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연결고리는 역시 “돈”이다. 방대해진 교회재정이 목회자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하면서 교회타락의 정점을 찍고 있다. 어제 젊은 목회자와 대화에서 “대부분의 한국교회들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표현을 해서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그런다고 할지라도 우리교회만큼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이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되었으니,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성도)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버렸으니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왜곡한다. “제가 기도해 보고 결정했습니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인 것이다. 제왕적 목회를 하는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의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교회를 이끌어 가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교회문제의 중심에 “목회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문제가 꼭 목회자 한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목회자의 전횡에 대하여 못본 척, 모르는 척하는 수많은 교인들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물론 목회자에게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문화가 교회 내에 있다. 그것도 “목사에게 대적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샤마니즘을 그동안 성도들에게 심어준 목사들에게 문제의 근원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런 미신적인 말에 스스로 위축되어 있는 성도들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특히, 성도를 대표할 수 있는 장로들의 침묵은 말그대로 “저주”이다. 교회에서 그런 것을 바로 세우라고 장로로 세워주었는데, 그런 미신 때문에, 또 개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불의에 침묵하는 장로들이 있는 한, 목회자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교회의 분열만 자초할 것이 뻔하다. 일반 성도들도 교회의 운영이나 재정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은혜만 받으면 된다.”라는 식의 생각에서 탈피해야 한다.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만든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호성신학교라는 곳을 찾아 보았다. 추석연휴 마지막날 네이버 지도에서 “호성신학”을 찍고 갔는데, 막상 그곳에는 호성신학교가 있지 않았다. 태평성결교회로 옮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호성신학교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최근에 3명의 학생이 졸업을 했고, 재학생은 몇명 되지도 않고, 교수들이 바울교회의 재정으로 필리핀 세부에 워크숍을 간 것이 나와 있다. 현재의 호성신학교 모습에서 필리핀 세부로 워크숍을?이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참고. 뉴스1, 뉴스2)

사실 이런 대학은 없어져야 한다. 성결교단 해당 지방회에서도 폐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가 철회되어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금 한국은 너무 많은 대학들이 정리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런 신학교들은 없어져야 한다. 꼭 교단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젊은 신학도들이 있다면, 좀 더 큰 다른 교단의 신학교에 위탁교육을 시킬 수도 있다. 왜 퇴출되어야 할 대학을 유지하면서 성도들의 헌금을 써야하는지 되물어봐야 할 시점이 된 듯 하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지방도시에 있는 교회치고는 꽤나 크다. 그런 이유인지 수많은 방문객들이 있다. 공통점은 그런 방문객들에게 늘 “봉투”가 쥐어진다는 것이다. 어제 관련업무를 하는 젊은 목사에게 물었다. “왜 그런 사람들까지 모두 봉투를 하죠?”라고 말이다. 대답은 이렇다. “지금까지 늘 그렇게 해왔어요.”라고 답한다. 내가 역정을 냈다. “아니, 지금까지 그것이 관행적으로 해왔다고 계속 하면 어떡하냐? 고쳐야 할 관습이다. 그 모든 것이 교인들의 피같은 헌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과감이 끊을 것은 끊어야 한다. 그렇게 봉투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목사의 낯을 내기 위한 이유도 있다. 따라서 근절되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봉투이야기가 나와서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하는 봉투’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이제 심방이나 개업예배 등에 온 목회자에게 봉투를 하는 것은 근절되어야 한다. 예전에 목회자들에게 제대로 봉급을 주지 못할 때, 봉급을 채우는 방편으로 했던 봉투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은 어느 정도 급여를 받는다. 담임목사는 상당한 봉급을 받는다. 따라서 봉투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이것을 담임목사에게도 두번에 걸쳐 건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심방이나 개업예배를 드리는 경우, 교회에 감사헌금 형태로 얼마든지 감사함을 표시할 수 있다.

성도는 교회 안에 머물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들이 훨씬 많다. 따라서 그들이 교회 안에서 거룩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때로는 힘든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도 많다. 그들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되, 세상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교회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 교회가 타락할수록 성도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고, 그들을 착취한다. 헌금은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그들 스스로 부담잆어(때론 영적 부담감을 갖고) 감사함으로 낼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 내는 헌금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베풀고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서 두서 없이 이렇게 적어두는 것이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