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대생 [1]

By | 2019-09-30

제목을 “어떤 의대생”이라고 붙이고 보니 수많은 학생들이 떠오른다.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해부학교실에 조교로 남아서 해부학실습이나 조직학실습, 그리고 주관식 시험의 채점하는 것이 조교로서 큰 임무였다. 실험도 병행했기 때문에 업무량이 꽤나 많았다. 실험도 그렇지만, 실습이 늦게 끝나기 일쑤였다. 그러니 채점은 늘 12월이 되어서야 밤늦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채점을 하다보면 답안지를 한번 더 쳐다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유급생들의 답안지이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시험이 주관식이었기 때문에 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유급생 중 한명은 이미 두번의 유급을 한 학생이었다. 실습도 성실하게 했고, 간혹 질문을 하면 수줍어하기는 했지만 대답도 잘 하였다. 채점을 하던 중 그 학생의 답안지를 보았다. 주관식을 빠르게 채점을 하다보면 글씨가 바르고, 써내려가는 것이 정돈이 되어 있으면 쉽게 좋은 점수를 받는다. 왜냐하면, 키워드들이 금새 눈에 들어오고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답안지를 작정한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학생의 답안지는 그렇지 못했다. 글씨가 작고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모습에, 줄의 정열도 바르지 못했다. 때로는 글씨를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고, 주관식 답안지로서의 최악이었다. 그런데 빠르게 채점하던 중 속도를 떨어뜨리고 그 답안지를 열심히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핵심적인 키워드는 모두 기재해 놓았고, 주관식 설명도 매우 바르게 되어 있었다. 갑자기 이미 채점해 놓은 다른 시험지도 가져다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살펴볼 때 보다 더 높은 점수로 수정되었다.

함께 채점을 하고 있던 다른 조교선생에게 이 학생의 케이스를 이야기해주었고, 채점시 유의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시험의 횟수도 많고, 시험지 분량도 많은 해부학 시험지의 채점을 서두르다 보면 이런 학생들의 답안지를 놓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두번의 유급을 했을 때 답안지를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자칫 세번째 유급을 할 수도 있을 수 있는 그런 가능성도 있었다. 다행히도 그 학생은 2학년으로 잘 진급하였고, 그 후에 의사가 되어 지금 개원의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보게 되어 이렇게 적어둔다.

[추가] 하루가 지난 후 갑자기 ‘같은 제목의 시리즈글을 써볼까’라는 생각이 든다. 몇몇 학생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 thoughts on “어떤 의대생 [1]

  1. 김은영

    교수님
    제가 요즈음 뜸하네요, 이해해 주세요^^
    이런 교수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사람에 대한 정성’을 다시 느낍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1. 김형태 Post author

      김은영선생님,
      요즈음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이 땅은 가을이 성큼 왔습니다.
      들녘은 황금들녘입니다.
      요즈음은 황금들녘과 가을하늘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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