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등반

By | 2020년 4월 17일

내가 의예과에 입학했을 때에는 의과대학에 동아리(당시에는 모두 ‘써클’이라고 불렀던)에 가입하는 것이 하나의 철칙이었다. 물론 졸업정원제로 학생수가 늘면서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지만, 선후배관계가 중요한 의과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신생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로선 따로 동아리 가입을 권유받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본과생이었던 4촌형의 권유로 “전남의대Y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이미 입학 전에 본과 2학년까지 대면식(!)이라는 것을 다 치루었고, 의예과 2학년과는 수시로 술자리를 가졌다. 전남의대Y회(이하 ‘Y회’)는 정식적으로는 본과 1학년부터 4학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의예과생들은 “흐름Y”라는 독립된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다. 의예과를 마치면 자연스럽게 전남의대Y회에 가입하게 된다. 물론 가입은 “보컬테스트”라는 독특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가곡을 하나씩 불러서 선배들이 통과를 시켜주어야 한다. 물론 떨어지면 재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아무튼 독특한 분위기의 흐름Y는 입학식을 마치면 “훈련등반”을 하게 된다. 당시에 대부분의 동아리들도 그런 과정을 했다. 좀 더 심하게 하는 동이라도 있고, 모양새만 갖추는 동아리도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상록, MRC, MPR, MS, CELL, 한우리, 힌두레 등 많은 동아리들이 나름대로의 전통(?)에 따라 훈련등반이란 이름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흐름Y의 훈련등반 코스는 항상 같은 코스를 달리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에 담양댐 입구에 도착을 하면, 바로 각자의 배낭무게를 측정한다. 이미 버너와 음식물, 침낭 등으로 무게가 상당했지만 20kg을 만든다. 무게가 부족하면 돌로 채워 넣는다. 의예과2학년 선배 중 한명이 “등반대장”이 되어서 1박 2일의 과정을 이끈다. 등반대장은 자신의 배낭에서 저울을 꺼내들고 일일이 무게를 측정한다.

무게 20kg의 배낭은 그 자체로도 무겁다. 문제는 바로 출발해서 추월산 쪽으로 달린다. 문제는 담양댐 마을 입구에서 추월산 쪽 길은 오르막길이다. 갑자기 무거워진 배낭과 오르막길은 모든 동기들에겐 버거운 길이 된다. 선배들도 같이 뛰지만 그들의 배낭은 상대적으로 가볍다. 훈련대장은 버거워하는 신입생들을 다그친다. 그러다가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매질을 해댄다. 군대에서 행하던 일명 “얼차려”이다. 처음부터 그것을 당연시하는 학생도 있지만, ‘이게 뭐지?’라는 질문을 갖는 친구들이 생긴다.

그러나 이미 한 배(?)를 탄 동기들은 억압적인 분위기에 순응(?)해가면서 담양댐에서 추월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뛴다. 이번에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약 7km의 거리이다. 그것도 오르막길이다. 당시에도 같은 이름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번에 확인해 본 바로는 “추월산 무릉도원 터널”이다. 이 터널을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이 터널까지가 전체적으로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뛰는데 쉽지 않다.

이 터널이 지나면 조금은 내리막길도 있다. 그런데 등반대장은 절대로 후배들이 쉽게 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구실을 대서라도 체벌을 가한다. 매질도 가한다. 그렇게 추월산 입구에 도착하면 해가 넘어가려고 한다. 추월산의 방향이 해가 일찍 저무는 위치에 있다. 서둘러 저녁을 준비하고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흘려놓은 쌀이 문제가 된다.

훈련대장은 “너희들이 이 쌀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너희 입에 들어가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농부의 땀과 수고에 대하여 너희들이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니 이렇게 쌀을 흘려놓는 것이다.”라며 다시 체벌을 가한다. 다시 매질도 한다. 그러면서 “너희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반성하고 와라.”라며 다시 신입생들에게 토론의 시간을 주기도 한다.

이 때 훈련등반의 신입생에 대한 태도 때문에 회의를 품는 사람이 생긴다. “나는 못하겠다. 동아리 빠지겠다.”라면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순응(?)하는 신입생들이 많아서 오히려 그런 친구를 다독이며 “하루만 더 버티자.”라며 그 친구를 설득한다. 그런 후에 다시 선배들에게 가서 함께 나누었던 생각들을 말한다. 조금은 쇼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렇게 첫날 저녁이 지나간다. 그리고 잠자리에 든다.

그런데 새벽 4시에 갑자기 기상을 한다. 전날 몇시에 기상하는지 알려주지 않은 듯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고없는 갑작스런 기상은 ‘의사로서의 삶이 그렇다.’라는 의미라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두번째날의 훈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두번째 날은 아침식사 후에 추월산 등반이다. 이번에 가보니 케이블카가 있다(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추월산은 오르기에 쉽지 않은(오히려 내려오기가 더 힘든) 그런 악산이다. 오전에 그런 산행을 마치고 점심을 해 먹은 후에 다시 배낭을 챙긴다. 전날과는 달리 무게를 측정하지 않지만, 동기들끼지 무게를 어느 정도 조절한다.

어제 달려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서, 담양댐에서 담양읍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코스이다. 어젯밤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17.1km라고 나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래 지도에서 표시도니 동선일 것이다. 지금은 다른 큰 길들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지도의 동선으로 달렸을 것이다.

점심식사 후에 달려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다. 어제 이미 달려온 길이라 오히려 그 공포가 있다. 터널까지는 오르막길이고, 그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다. 사실 뛰다나 담양호에 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날부터 누적도니 피로 때문인지, 밤새 먹은 술 때문인지, 오전의 산행이 힘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런 모든 것들이 누적된 탓인지, 첫코스부터 낙오자들이 발생한다. 그러면 동기들끼리 서로 부축하면서 달린다. 그러면서 어떤 동기애(?) 같은 것이 생긴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에 쳐졌던 동기를 부축하던 동기가 체력이 소진되어 다시 낙오자가 된다. 그러면 다른 동기들이 부축을 하면서 뛰고, 다시 체력이 소진되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 그렇게 담양댐까지 내려오면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또 체벌을 가한다. 그러면서 훈련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마지막 코스이다. 우리 모두 지쳐있다. 서로 도우면서 마지막 코스를 완성해 보자.”라며 독려한다. 그런데 사실 이 시점에서도 체력이 방전된 상태이다. 아무튼 다시 베낭을 매고 담양읍을 향해 달린다.

중간에 마을 앞을 지나기도 한다. 체벌을 하는 모습을 보며 “어째 저렇게 벌주고 때린다냐?”라며 말리려는 어른들도 있다. 아무튼 마을 어른들에겐 구경거리가 된다. 담양댐에서 담양읍까지 약 10km 정도를 뛰어야 하는데,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이렇게 뛰어본 적이 없는 신입생들에겐 버거운 시간들이다. 상대적으로 2학년 선배들은 잘 뛰는데, 아마도 이미 한번 뛰어 본 코스라서 더 쉽게 뛰는 것도 있을 테고, 후배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낙오자들이 발생한다. 아미 다리가 풀리고, 눈동자가 풀린 동기도 있다. 베낭은 이미 선배들이 대신 짊어준다. 동기생들 중에는 짊어질 사람이 없다. 다들 지쳐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간 쯤인 금성면 정도에 왔을 때에는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극한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아마도 이 쯤에서 ‘지나가는 버스에 부딪쳐 버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을 아는 선배들은 차량이 지나갈 때면 철저하게 1:1로 후배들을 붙잡는다.

선배들은 “곧 담양읍에 도착한다.”라 말하지만, 그 말이 믿어지지도 않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무조건 뛰는 것이다. 아마도 이 때 쯤 물도 다 소진되었었던 것 같다. 이 정도 뛰었을 때에는 신입생이라 선배나 모두 지쳐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동기생 중 한명이 혼자서 앞으로 뛰어가고 말았다. 동기들도, 선배들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동기는 마중나온 본과생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논의 옆 도랑의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두번째 날 오후에 본과선배들과 동아리 여학생들이 마중을 나온다. 마중을 나와 만나는 곳이 주로 메타세쿼이아 길이다. 담양읍에서 금성면으로 이어지는 그 길이다. 지금은 “담순로”이다. 담양과 순창을 잊는 길이다. 당시에는 버스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아무튼 그 동기는 선배들에게 발견되어 다시 뒤로 되돌아오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기억으로는 그 친구는 거의 극한 상황을 넘어 인사불성 상태였다.

훈련대장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른다. “선배님들, 또 동기 여학생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느냐?”며 계속 다그친다. 그러나 이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지쳐서 제대로 뛸 수 없다. 마중나온 선배들이 베낭을 대신 메고, 흐름Y 동기 여학생들이 옆에서 함께 뛰어주며 메타세쿼이아 길을 달린다. 차량들이 옆으로 바로 지나가는 위험한 길에서 말이다. 그렇게 달려서 담양읍 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한다.

그리고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 대인동에 있는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기억은 없는데, 어제 통화한 동기가 “당시에 근처 중국집에서 동기 여학생들과 선배들이 함께 짜장면을 먹고 헤어졌다.”라고 말해주었다. 아무튼 1박 2일의 훈련등반은 그렇게 끝이 났다. 어제 지도와 함께 페이스북에 이렇게 올렸다.

전남의대 입학 후 “Y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해서, 3월에 “훈련등반”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동아리들이 하던 것. 저희 동아리 코스는 첫날 토요일 오후에 담양댐에서 추월산입구까지 뛰는 코스입니다. 약7km됩니다. 다음날 일요일에는 아침에 추월산 산행을 합니다. 그리고 점심먹고 추월산에 담양댐을 거쳐…메타세쿼이아 길을 달려.. 담양읍까지 오는 약 17km 거리를 뛰는 것입니다. 베낭은 20kg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족하면 돌로 채웁니다. 요즈음 기준으로 하면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그것을 통해서 분명히 얻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에….잠겨 봅니다. 늙으니깐… ㅋㅋ

2020.4.16. 페이스북에 올린 글

거기에 페친인 의대 동기들의 질문이 있었다. “얻은 것은 무엇이냐?”라는. 물론 동기 중 이런 댓글을 단 페친도 있다.

“전우애, 추억, 사회성, 생존능력, 어떤 상태에서도 살아 남는다?”

그 말에 절대 공감한다. 난 여기에 한가지를 덪붙이고 싶다. 나는 훈련등반 1박 2일의 시간을 통해서 “극한 상황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곧 그의 인생의 모습과 일치한다.”라는 것이다. 모두가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동기나 선배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다양하다. 대다수가 보여주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일부 동기들이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바로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결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동기들이 어떤 삶을 살아오고 있는지를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와중에도 꾀를 부리거나 엄살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모습들이 삶의 과정에 보여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갖고 태어난 것이 다르다. 따라서 같은 환경에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반응한다. 특히 자기방어가 필요한 상황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 사람의 인생을 보여준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본다면 말도 안되는 시간들이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용인되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훈련등반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는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이 맞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추억이 아닌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런 기회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 과거의 길을 이번에 다녀올 수 있었다. 감사할 일이다.

추월산 무릉도원 터널 입구에서 바라본 담양댐과 담양호
추월산 입구, 담양호 위에 놓여진 다리 위에서 찍음.
담양과 순창을 잊는 담순로의 메탁세쿼이아 길. 담양에서 순창방향으로.


2 thoughts on “훈련등반

  1. 김은영

    재밌게 읽었네요.
    분위기, 상황, 등장인물 등이 저의 시간과도 비슷해서요.
    선배 양반들, 지금 저랬다가는 어딘가 끌려가겠지요?
    그런데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요?
    .
    .
    .
    기타요~~

    Reply
    1. 김형태 Post author

      맞습니다.
      지금 같으면 저렇게 하면 아마도 신고가 들어갈 겁니다.
      기타…이야기를 하시니…
      지리산에 가든지… 어딜 가는지… 등반을 가면…
      기타를 들고 갔었죠.
      저희 동아리에도 1년 선배가 꼭 챙겨갔습니다.
      기타를 참 잘 쳤던 선배입니다.
      이름이 여자이름이어서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영옥…선배…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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