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인 신앙

By | 2014년 7월 6일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그 권위를 상실했다. 한국교회의 권위의 상실은 교회가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유혹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탐욕과 권력, 그리고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경제적으로 급성장을 하는 배경에는 “경쟁”이라는 도구가 있었다. 교회의 성장배경에도 우리사회가 갖는 “경쟁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경쟁을 통해 우리사회는 ‘탐욕과 권력, 그리고 성공’를 쟁취하여 왔다. 그 경쟁은 사회전반적인 현상이며, 심지어 교육에서도 경쟁을 무기로 삼고 있다. 그렇게 빠른 발전을 이루는 사이에 우리사회는 “철학”과 “윤리”를 잃어버렸다. 그 모습이 교회안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특히 다른 종교에 비하여 급성장한 교회가 더욱 그러했다. 우리사회는 교회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마져든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외형적 건물이 아니다. 건물은 예배드리고, 교육하고, 모이는 장소일 뿐이다(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하는 건물은 ‘예배당’이라는 표현이 맞다. 성전이라는 표현도 신학적으로 맞지 않은 말이다). 우리사회의 외형이 발전하듯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발전하는 것을 우리 사회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크리스천들의 거룩함”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들에게 거룩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단순히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거룩하다고 보지 않는다.

크리스천 한사람 한사람의 거룩한 삶의 모습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거룩함은 “윤리”이다. 그들이 성경내용을 알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각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만큼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사회가 악해지더라도 크리스천 만큼은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이 크리스천에 갖는 “기대”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거나, 그들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사회적 권위를 잃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교회가 기업이라고, 교회도 세상과 다르지 않고 똑같다고 성토하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달라도 뭔가 달라’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꿈이 되어 버렸다.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크리스천 뿐만 아니고 머리를 하늘도 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받는 진리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는 윤리적인 것과 율법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윤리적인 것을 이야기하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율법적 행위가 아닌 윤리적 행위는 기독교의 구원관을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가 추구해야 할 인간 삶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비판적 사고없이 그 문화를 그대로 교회안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크리스천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아니 어떤 비교의 대상이 없이 절대적인 윤리관을 가져야 한다. 즉, 적당히 윤리적이거나, 세상사람보다 좀 더 윤리적이어서는 안된다. 절대적인 윤리관이 요구된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힘이 원천이 된다. 더 불편하더라도, 더 손해보더라도, 더 힘들더라도 크리스천들은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질 때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던 분노에 찬 하나님의 눈에서도 노아가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더 윤리적으로 살 때 교회의 부흥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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