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마을은 장언리이지만, 둔전리와 붙어 있어서 사실상 한 마을이나 다름이 없었다. 행정구역상 나뉘어져 있을 뿐 좁은 길 하나를 두고 마을이 갈라져 있었는데, 장언리의 집들 중 절반은 둔전리 안으로 파고 들어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두 마을은 그냥 하나의 마을로 인식하고 있었다.
둔전리에서도 산쪽으로, 그러니까 마을의 윗쪽에 가면 흙으로 지어진 작은 초가집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똥바아저씨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의 시골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상태였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똥바아저씨네는 가난했다. 아이들을 초등학교도 보낼 수 없었으니 그 가난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똥바”라는 말을 살펴보아야 한다. 진도에서는(아마도 전라도의 남쪽 해변가에서는 그랬을 듯하다) “~바”라는 남자에게 붙이는 어미사가 있다. 이를테면 아들이 많은 집에서 순서를 말할 때, “큰 놈, 작은 놈, 시바, 니바, 오바, 육바, 칠바….”이런 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첫째아들, 둘째아들, 세째아들, 네째아들, 다섯째아들, 여섯째아들, 일곱째아들….”을 의미한다. 참고로 둘째아들을 일컫는 말로, “두바”와 “간뎃놈”이 있다. “~바”는 여러 곳에서 남자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점바(얼굴에 점이 많은 남자), 일름바(고자질을 잘 하는 남자), 억지바(억지를 잘 부리는 남자, 비슷한 의미로 긱바라고도 한다), 껄떡바(먹을 것을 밝히는 남자, 비슷한 말로 껄떡새가 있다), 오꾸바(눈이 움폭하게 들어간 남자), 등등 다양하다. 여자에서는 비슷한 표현으로 “단이”가 있다. 춘향전에서 나오는 향단이와 같은 맥락이다. “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한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듯 하다.
아무튼 똥바아저씨는 똥지개를 많이 지고 다녀서 그렇기도 하고, 옷도 허름하고 행색이 지금으로 보면 거의 노숙자와 같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똥바아저씨네의 아이들은 몇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기억나는 사람은 큰 딸과 나와 나이가 엇비슷한 아들이고, 그 밑으로 동생들이 있었는데 잘 기억나질 않는다. 나의 어린 눈으로 보았을 때도 똥바아저씨도 아이들도 모두 가난하게 보였고, 그 가난을 이겨낼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여겨졌다. 똥바아저씨는 말 수는 적었지만, 인사를 하면 꼭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 주곤 하셨다. 따라서 무섭지는 않았다.
큰 딸을 기억하는 것은 똥바아저씨네 아줌마가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을 때 있었던 일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줌마는 30대 후반정도에 돌아가셨던 것 같다. 상여(당시에는 마을에 상여가 따로 있었고, 상여꾼도 마을사람들로 구성되었다)가 가는데, 그 큰 딸이 얼마나 크고 서럽게 곡을 하던지 지금도 잊쳐지질 않는다. 당시 나는 상여가 무서워서 집안에 숨어 있었는데, 우리집 근처 신작로(당시에 비포장도로였지만 버스가 지나갈 수준의 대로였다)에서 상여가 멈추어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나는 그 우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상가집에서 보았던 가장 서럽고 슬프고 큰 곡소리였다.
똥바아저씨 큰 아들은 나와 엇비슷한 나이였는데, 학교를 다니질 않아서 글자를 잘 몰랐다. 그런데 우리집 앞에서 늘 진열장속 약이름을 읽곤 했다. 한글을 스스로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글자들을 읽으며 자랑스러워했던 그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 아이는 나중에(우리집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간 후에) 정미소에서 쌀을 한주먹 잡았다가 그만 벨트에 팔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였다(그 정미소는 내 친구 집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똥바아저씨네 가족들이 나중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가난”이라는 단어에서 꼭 떠오르는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