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는 각 집마다 자녀들을 적어도 다섯명 이상은 낳았다. 60년대만 해도 영아사망률이 많이 낮아졌기 때문에 대부분 가난하였지만 다들 잘 자랐다. 내 형제도 원래는 8명이어야 하지만, 6번째로 태어난 여자 쌍둥이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의 가장 먼 기억이 바로 그 쌍둥이들이 태어난 날이었다. 태어난 날은 분명하게 기억을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각 집마다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에 유독 10명 가까이 낳는 집들이 있다. 물론 당시에는 인력은 곧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농업의 특성상 자녀들이 많을수록 공짜로 노동력을 제공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노동력 때문이 아닌 순전히 “아들”을 낳기 위한 몸부림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낳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집 앞쪽으로 나있는 신작로 북쪽에는 몇 집들이 있었는데, 그 집들은 길 보다 낮은 마당을 한 그런 집이었다. 길에서 그 집을 보면 마당과 집안이 훤히 보이는 그런 식이었다. 아무튼 그 집에 딸이 많다는 것과 마당에 우물이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 집에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다. 얼마나 귀한 손이련가! 대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아들이었던 셈이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딸이 7명인가 8명인가 그랬던 것 같다.
큰년, 작은년(또는 간뎃년), 시단이, 니단이, 오단이, 육단이, 칠단이….. 그 뒤에 아들이 태어났다. 몇째 딸인지 모르겠지만, 그 귀한 아들을 항상 업고 다녔다. 지금처럼 업는 보자기가 아닌 무명으로 된 아이들의 기저귀(긴 명주천을 접어서 기저귀로 채우는) 하나를 풀어서 그것으로 업은 아이의 엉덩이와 허리를 돌려서 묶는 방식이었다. 아이가 좀 나대면 보자기는 엉덩이에 살짝 걸치게 되어서 아이가 빠질 수 있다. 물론 손으로 엉덩이와 허리를 받치기 때문에 잘 떨어지지는 않는다.
마을 앞에는 바다쪽을 막아서 만든 간척지 논들이 많이 있었고, 마을쪽으로는 옛부터 내려오는 논들도 있었다. 그 논들 사이에 둠벙(못과 같은 작은 저수지를 의미하는 방언. 충청도 이남에서 쓰였다고 함)이 몇개 있었다. 간척지 논들은 둔전 저수지에서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했지만, 마을 근처에 있는 재래식 논들은 그런 둠벙에서 물을 퍼올려서 물을 공급했다. 전에 써놓은 이야기(4. 상여집)에서 나오는 바로 그 상여집에서 큰 길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논들 사이에 그런 둠벙이 하나 있었다. 그 둠벙의 둑에서 아이를 업고 돌보던 그 아이의 누나가 그만 실수로 아이를 둠벙에 빠뜨리고 말았다. 아이를 미처 건저내지 못하고 아이는 익사하고 말았다.
참으로 온 동네가 숨죽이 듯 며칠을 지냈던 아픈 기억이다. 아이를 보살피던 누나의 실수인지 아니면 어떤 운명의 장난이던지 모르겠지만, 그 집의 슬픔 뿐만 아니라 온 동네의 슬픔이기도 했다. 동생을 빠뜨렸던 그 딸이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인생의 큰 상처와 짐이 되었던 슬픈 과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