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By | 2016년 6월 28일

출판사 서펑(책의 겉표지 뒷면에 적힌 서평이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보고를 하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는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한때 자기가 의무로 여겼던 것이 이제는 범죄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판단의 규칙을 마치 단지 또 다른 하나의 언어규칙에 불과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다소 제한된 양의 관용구에다 몇 가지 새로운 것들을 추가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 그 관용구 가운데 어떤 것도 적용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전혀 어찌할 수 없었다.    – 안나 아렌트-

유대인 출신 미국인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년 10월 14일 ~ 1975년 12월 4일, 독일 쾨니히스베르크 태생)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는 나치전범인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5월 31일)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하여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961년 4월 11일 공개재판을 지켜보는 과정을 적은 재판참관기의 내용에서 나온다.

1961년 법정에 선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론은 수많은 유대인 학살에 자의적으로 참여했던 아이히만이 아주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일 것이라는 것과는 달리 매우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극악무도한 모습을 상상했던 저자는 아이히만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이런 사람이 엄청난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서 내린 결론아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거짓된 증언과 행동에서 속았다는 수많은 반론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속성에 있는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성경의 “원죄설”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동양철학에서의 성악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이 가진 죄의 속성이다. 어떤 국가나 기관, 단체에서 만들어지는 상황에 따라 인간의 죄성이 발현된다. 이 죄성은 상황이라는 환경에서 합리화되고 보편화되는 속성이다. 아이히만 처럼(실제는 아닐 수 있음) 평범한 가장이요, 남편이었던 독일시민이었던 그가 전쟁이라는 환경에서(반유대주의가 팽배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합리화하면서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추악한 일을 저질렀다.

한 때 우리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지금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왕따문제도 대표적인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다. 그저 집에서는 착하고 여린 자식이지만, 학교라는 환경하에서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이중적 모습속에서도 우리는 죄의 평범성을 찾아 볼 수 있다. 비단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절대 다수에 섰다고 그것이 정의가 아닌 경우가 많다. 소설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수에 선 군중들은 스스로 도덕적 완벽주의자처럼 행동한다.

우리 인간은 죄성을 지닌 채 세상에 태어났다. 그 죄성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그 죄성이 인간을 향할 때 인간사회는 파괴된다. 그것이 개인이던지 공동체이던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늘 성찰하고, 겸손하고 겸허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나의 작은 생각과 행동이 타인에서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 성찰과 행동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만한 죄를 지었지만, 우리자신도 얼마든지 그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똑같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이기 떄문이다.

요한복음 8장 2절에서 10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중고로 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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