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

By | 2014년 6월 11일

한정적인 시간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내세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영원한 삶을 꿈꾸지만 그것도 남들보다 좀 더 살 뿐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본능 뿐만 아니라 이성적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내세에 대한 수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그것이 종교로 이어진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이외의 타종교에서만 이야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제는 기독교안에서도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극소의 사람들이 있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서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니 읽어보면 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이다. “정말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할 만큼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편리한대로 해석을 하는 것인지”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6-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는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면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기독교는 아무런 의미없는 종교가 될 뿐이다. 구원에 관하여서는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배타적이면 안된다. 그들은 먼저 손내밀어 화합해야 하고, 먼저 사랑해야 하고, 먼저 배려해야 한다. 분명히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세상과 등지고 살아서는 안된다. 수많은 세상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기대가 바로 그런 것은 아닐까?

종교다원주의를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기독교복음의 본질을 희석하거나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도 구원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러나 그 생각으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이것은 내 관점이다).

죽음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살아야 하는 모든 인간은 당연히 내세와 영생에 대한 생각들을 갖게 된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게 된다(꼭 내세관 때문에 종교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다원주의의 발생은 기도교인들의 삶의 태도와 관련이 많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배타적인 구원관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타적인 삶의 모습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꾸 종교다원주의가 생긴 것은 아닐까?

고린도전서 3장 18-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개역한글버전)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새번역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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