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26] 한양영배사

By | 2014년 9월 16일

어릴 때 우리 동네에는 전기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다. 당연히 TV도 없었다. 극장도 없었다. 그러나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몇달만에 한번씩 찾아오는 한양영배사 덕분이었다. 한양영배사는 말그대로 영화배급처이다. 마을의 넓은 땅에 천막을 두룬 일종의 가설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스크린은 외벽천막의 안쪽에 쳐지기 때문에 외부에서 영화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소리는 들을 수 있다.

한양영배사는 영화상영 몇주전부터 포스터를 붙인다. 포스터는 영화상영 장소까지 걸어 올 수 있는 동네까지 붙이는데, 주로 각 마을의 가게에 붙였다. 누군가 떼어갈 수 있기 때문에 가게 유리문 안쪽에 붙였다. 영화가 끝나는 날 그 포스터를 가져오면 공짜로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다시 수거해야 하는 번거러움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우리집 약방에도 항상 포스터가 붙었었다. 온 동네를 트럭인가 짚차를 타고 확성기로 광고를 하고 다녔다.

상영시기 하루나 이틀 전날에 가설극장이 만들어진다. 가설극장은 구덩이를 깊게 파서 거기에 3m가 넘는 나무기둥을 세운다. 나무기둥이 다 세워지면 두꺼운 천막을 두른다. 그 천막은 매우 두껍다. 베이지색의 차일천막이었다. 이 천막은 외벽 역할을 하였고, 스크린으로 쓸 천만은 안쪽에 다시 쳤다. 스크린 천막은 두 개의 기둥을 세운 후에 팽팽하게 잡아당겨서 쳤다. 젊은 아저씨들이 여럿이서 이 일을 했다. 천막의 한쪽에는 입구를 만드는데 들어갈 때 돈을 받도록 되어 있고, 좁고 길게 만들어서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과 공짜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했다.

간혹 아이들 중에는 칼로 외벽 천막을 뜯고 들어가는 애들이 있었다. 걸리면 정말 심하다 할 정도로 맞았다. 들어가는 입구가 가로방향으로 된 나무 기둥이 있었는데 거기 아래쪽으로 살짝 들어가는 애들도 있었다. 가장 행복한 아이들은 상영 마지막날까지 기다렸다가 마을 가게 주인에게 잘 보여서 포스터를 떼어가지고 오는 애들이다. 공짜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영화는 영사기로 스크린에 비추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전기가 필요했지만 당시 마을에 전기가 없던터라 자가 발전기를 이용했다. 자가발전기는 소음 때문에 가설극장에서 가능한 멀리 떼어 놓으려고 했다. 여름철에는 가설극장 입구에 켜놓은 전구 아래에 벌레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외벽천막을 걷어 올린다. 바깥에서 소리만 듣는 사람들도 모두 영화를 볼 수 있는 찬스이다.

한양영배사라고 하면 두 사람이 떠오른다. 한명은 매니저급이었던 “수련이 아저씨”이다. 이름이 “수련”씨였을 것이다. 이 아저씨는 우리 동네에 오면 꺼리낌없이 우리집을 들락거렸다. 식사도 하고, 우리들에게 참 잘 해주는 친한 아저씨였다. 아마도 우리에게 맛있는 과자도 자주 사주었다.

또한명의 아저씨는 영사기를 돌리는 아저씨인데 낮시간에 주로 끊어진 필름을 매니큐어와 비슷하게 생긴 본드로 필름을 서로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계속 수동으로 돌려가면서 끊어진 부분을 찾아서 연결하던 아저씨는 호기심에 가까이 간 내 얼굴에 발가락을 내밀었다. 그 발가락 끝이 내 얼굴에 닿았다. 고약한 발꼬랑내가 났다. 그 아저씨는 쪼리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발이 지저분했다. 아무튼 좋지 못한 기억이다. 인상도 나쁜 아저씨였다.

한양영배사는 극장이 없었던 시골마을에 많은 기쁨을 주곤했다(진도읍에는 옥천극장이란 극장이 하나 있었다). 가끔 보는 영화였지만 그 때 영화를 봤던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은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이다. 귀하기에 소중하게 간직되는 기억이다.

*한양영배사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가설극장’이라고 나오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진도에서만 있었는지 아니면 전남의 남쪽 지역을 다 돌아다녔는지도 알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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