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의신면 칠전리에 있던 외할머니댁에 갔다가 태권도를 처음 배우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에 사는 인자이모가 직접 만들어준 도복을 입고서 말이다. 오랫동안 외할머니댁에 머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주일 가량 배우다가 집으로 되돌아 왔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한 후에 방학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발표하던 중, 선생님(박하준 선생님 이야기에서 나오는)께서 시범을 보여달라고 해서 앞지르기와 앞차기를 교실 앞으로 나와서 했던 적이 있다. 아무튼 아쉽게 일주일만 배우고 그만 두었던 태권도였지만, 이모가 만들어 준 도복을 집에 가져왔다.
그 다음 해에 우리 마을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다. 팔뚝이 굵고 건장한 체격의 아저씨였다. 우리집 건너편 집 모퉁이에 작은 가게를 만드셨다(자기 땅이 아닌 친척의 마당에 지어 만든). 가게와 방 하나인 그런 가게였다. 군대에 갔다가 제대를 하고 시골로 내려왔다고 했다.
조그마한 가게를 열었지만 장사가 별로였다. 왜냐면 우리마을엔 가게가 이미 3개가 있었다. 우리집 앞(“병식이의 도둑질” 이야기에서 나오는), 그리고 세등리로 가는 언덕길 아래에, 그리고 둔전리 돌비석이 서있는 모퉁이집(아마도 내 동창인 영미네집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모두 세군데나 있었다. 따라서 그 아저씨는 남의 농사일도 도왔다. 그리고 태권도를 배울 아이들을 모집했다. 태권도복까지 있던 나는 당연히 배우기로 했다.
아저씨는 태권도의 기본동작 뿐만 아니라 유도에서 사용하는 낙법도 가르쳐 주었다. 당시 매트리스가 없던 시절에 마당에 짚으로 만든 멍석(진도에서는 멍석보다는 사투리인 ‘덕석’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을 깔고 했지만 팔꿈치가 까지기 일쑤였다.
몇개월간 계속된 태권도 수업은 나보다 나이가 두세살 많은 형들의 방해로 끝이 나고 말았다. 당시에 그 형들에게 협박을 받았다. “네가 태권도를 계속하면 덕석위에 유리를 깨서 깔아버리겠다” 등의 협박이었다. 가난한 태권도 사범은 몇개월만에 모든 태권도제자들을 잃고 말았다. 수입원도 없어졌다. 그렇게 협박한 아이들의 주범은 바로 그 가게의 땅주인 아들이었다. 그 아저씨에겐 먼 조카가 되는 관계이다. 그 아이의 이니셜은 DW이다.
왜 그들이 태권도를 계속 하는 것을 방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소문에는 자기들 보다 어린 동생들이 태권도를 훨씬 더 빨리 배우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나중에 태권도사범에 대한 소문이 돌았는데, 그 아저씨는 북파공작원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문에 의하면 ‘군대에서 사고를 쳤는데, 그것을 무마해주는 조건으로 북파되었다가 살아서 되돌아왔다’라는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 아저씨가 마을에서 계속 살았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면 나는 몇년 뒤에 금골리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배운 태권도 때문에 지금도 내 자신이 태권도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