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추억 중 가장 반복적인 기억이 바로 “정월 대보름”의 추억들이다. 정월 대보름은 겨울의 겨울잠에서 깨어난 동물의 본능처럼 들판을 뛰어 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어른이 된 뒤에 생각하니 그럴 듯 하다.
나는 오곡밥을 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불놀이를 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정월대보름이 다가오면 통조림 깡통을 찾는다. 못과 망치를 이용하여 깡통의 모든 면에 수십개의 구멍을 뚫는다. 또 적당한 위치에 고리를 만들어 긴 철사를 연결한다. 나중에 쥐불놀이 할 때 돌릴 수 있도록 말이다.
낮시간에는 논두렁에 불을 놓고, 밤에는 친구들과 낮에 산에서 가져온 송진이 묻은 소나무 조각을 이용해 깡통안에 불을 붙인다. 당시에는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오곡밥을 얻으러 다니는 것은 그리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놀이를 주로 했다. 간혹 옆마을과 불싸움을 하기도 했는데, 싸움질을 잘하지 못했던 나도 마을 형들을 따라다니며 밤새 놀곤 했다. 진도에서는 지신밟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다만, 보름날 아침이 되면 친구를 만나 더위팔기를 하곤 했다. 예를 들어 “평삼아~”라고 부르면, 평삼이가 대답을 하면 “내더위!”라고 외친다. 그러면 내 더위를 판 셈이다. 난 처음에 그 소리를 동네 할아버지에게 들었는데 ‘내더위’라는 말을 빨리 했는지 “내~덕”처럼 들렸다. 한참동안 “내덕!”이라고 하곤 했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사람 중 한명은 “동강원“이라는 시설에서 일하는 아저씨가 아침 일찍 길에서 만나 내게 더위를 판 일이었다. 허름한 옷차람의 그 아저씨가 지게를 지고 가며 내 이름을 불러, 내가 대답하니 “내더위!”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일 이후에 나는 더욱 공격적으로 더위를 팔곤 했다.
진도에서는 논두렁에 불을 놓는 것이 대부분이다. 달집태우기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간혹 논에 쌓아둔 볏짚에 불을 지르는 경우가 있다. 소에게 줄 여물이나, 초가집 지붕을 보수하기 위해 놔둔 볏짚에 불을 지르는 것은 동네어른들이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혹 아이들이 많이 모이면 이성을 잃고 불을 지르는 경우가 있다. 불이 나면 동네쪽에서 “이 놈들아~!”하고 논주인이 쫓아 온다.
아이들은 일제히 도망을 친다. 불을 직접 지르지 않았어도 공범이 되기 때문에 십수명의 아이들은 모두 도망을 간다. 걸리면 얻어맞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싣고 있던 고무신이 그만 논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신발을 찾으려는 데 시간도 없고, 아저씨는 쫓아오는 상황에서 나는 가까운 논두렁 뒤에 숨었다. 다행히도 보름달의 반대편 쪽에 숨었다. 그곳은 논두렁이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난 논두렁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이고 한참동안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만 한쪽 고무신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논주인에게 붙잡히진 않았지만, 그 다음날 동네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았다.
언젠가 한번은 우체국장님네 헛간에 있던 경운기 타이어를 훔쳐다가 (아마도 새타이어는 아니었겠지만 비상시에 사용하려고 놔 둔 것 같다) 길에서 불을 낸 아이들도 있었다. 이 사건은 좀 감정까지 개입해서 불을 낸 아이들의 부모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런 놀이들은 주로 남자애들끼리만 어울렸지만, 때론 동네의 남녀 아이들이 함께 노는 경우도 있었다. 함께 놀 수 있는 것은 술래잡기였다. 대부분 친한 친구들과 함께 숨지만, 때론 숨은 곳에서 낯선 아이를 마주치기도 했다. 당시에 내성적이었던 나로선 곤욕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간혹 여자동창(같은 학년)과 함께 같은 공간에 숨어 있는 일은 나로선 매우 불편한 시간이기도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정월대보름은 활동성이 더 떨어졌던 것 같다. 오히려 친구들과 논두렁에 구멍을 내서 화덕처럼 만들어 고구마를 잘라서 구워먹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오고 TV가 생기면서는 밖에서 나가노는 일이 줄어 들었다. 아마도 금골리로 이사한 이후의 정월대보름에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