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67] 고막을 다치다

By | 2014년 9월 22일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마을에 새로운 가정이 이사를 왔다. 그런데 그 집 큰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사시였다. 약간의 다른 장애도 있었지만, 사시 때문에 아이들이 놀리곤 했다. 어느날 마을회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날도 아이들이 “병신”이라고 놀렸다. 그 아기가 울면서 집으로 갔다.

집에 가는 이유는 아빠에게 말하려고 가는 것이다. 그런 일이 몇번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를 놀렸던 아이들은 다 도망을 갔다. 나는 놀리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자리에서 놀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빠가 오더니 “너냐? 우리 아들을 놀린게?”라며 다짜고짜 내 빰을 후려친다. 갑자기 빰을 맞는 나는 “나는 놀리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지만, 입에서 술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아저씨는 몇 대의 뺨을 더 떄렸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그 집에 갔던 것 같다. 그 아저씨는 알콜 중독자였다. 시골에 와서 남의 논을 소작하면서 살아갔는데, 농사철이 아니면 그렇게 늘 술에 취해 있었다.

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목포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갔다. 목포를 가려면 버스를 타고, 녹진항에 가서 명신호(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를 타고 목포로 가야 한다. 그리고 진료를 보고 서둘러 다시 배를 타고 녹진항을 거쳐 집으로 와야 했다. 이비인후과에 가니 “고막이 틀어졌다”며, 코에 공기를 주입하는 스테인레스 호스를 넣고 바람을 집어 넣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코 >> 인두 >> 유스타키안관 >> 중이를 통해 고막을 압력으로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치료이다. 끝이 약간 휜 스테인레스 호스를 유스타키안관 입구에 대고 바람을 불어대니 초등학교 2학년 짜리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당연히 코피도 나고.

그러나 치료는 신통치 않았고, 몇주후에 다시 목포에 가서 같은 치료를 반복했다. 세번째인가 네번째인가는 목포 이비인후과에까지 가서 치료를 거부했다. 나를 데리고 간 엄마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 왔다. 그 뒤로 치료를 하지 않았지만 나는 듣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발생했다. “ㅍ”과 “ㅎ” 자음이 혼동되고, “ㅋ”과 “ㅊ”도 헷갈렸다. 지금도 약간의 그런 경향을 갖고 있다. 나중에 성인이 된 이후에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해보니 고음역대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결과를 보였다. 지금도 왼쪽귀는 불편함이 남아 있다.

술취한 아저씨는 장애인 아들을 키우며 버겁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많이 힘들었던지 그렇게 술을 매일 마셔댔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여전히 늘 술에 취해서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 아저씨는 술에 취한 상태로 길바닥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남은 가족들은 그 마을을 떠났다. 아마도 죽은 여자의 친정이 있는 동네로 갔다는 소문만 남았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