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돼지를 한마리 키웠다. 화장실이 있던 한쪽 마당의 돼지우리가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키웠던 돼지는 암돼지였는데, 어느날 새끼를 많이 낳았다.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이던 돼지가 생각난다. 여러마리의 새끼들이 달라붙어 젖을 빨곤 했다. 그런데 그 어미돼지의 상태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래서 팔기로 한 것 같다. 아저씨들이 돼지를 보더니 “내일 낮에 가질러 올께요”라고 떠났다.
당시에 어미가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새끼들의 건강이 좋지 못해 새끼들이 여러마리는 이미 죽었다. 다음날 해가 뜨기전에 아저씨들이 왔다. 어미의 무게를 재고 돈을 주고 떠났다. 아버지는 “낮에 온다는 사람들이 왜 새벽에 왔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무릎을 치셨다. 그 중간상인들은 새벽에 돼지의 몸무게가 가장 적게 나간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키웠던 돼지에게 아침이라도 먹여서 팔려는 생각에, 무게까지 적게 나간 상태에서 팔게 된 아쉬움이 겹쳤다. 장사를 하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그 바닥에서 닳고 단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두 마리의 새끼가 남게 되었다. 이미 새끼들이 많이 죽고 남은 새끼들이었다.
그 새끼들을 직접 키웠다. 우유를 먹여가며 키웠는데, 일반 우유 젖꼭지에 구멍을 더 크게 내서 먹였다. 새끼들은 금새 먹고 또 달라고 꿀꿀거렸다. 돼지가 강아지 처럼 사람을 따랐다. 그러나 새끼돼지의 사육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키우는 새끼돼지들은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다.
새끼돼지를 그렇게 강아지 키우듯 키워본 경험은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물론 상실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지만 말이다. 돼지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 뒤로 우리집에서는 돼지를 키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