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여가를 즐긴다”라던가 “레저활동”, “휴가”와 같은 용어들이 언제부터 쓰였으며, 또 언제부터 사람들이 그런 제대로 삶을 누리기 시작했을까? 먹고 살기위해서 발버둥치며 살아왔던 우리사회가 지금은 즐기기 위한 사회로 바뀌었다. 시골에 살았던 우리에게 이런 삶의 시작은 바로 “해수욕장”에 가는 것 부터 시작했으리라 본다. 더구나 학교에서 가는 소풍이 아니라 가족단위의 이런 생활이 드물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는 계모임때 이런 나들이를 많이 가는데 문제는 가족단위는 아니었다. 우리가족이 해수욕장에 간 것은 내가 4, 5학년 정도 되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해수욕장에서 입을 수영복을 입은 것이 그 시점이다. 누나와 여동생도 수영복이 처음 왔는데 수영복 안에 붙어 있는 뽕(?)을 떼어내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무렵부터 사람들은 여름에 해수욕장에 가기 시작한 듯 하다.
그 중 모세미 해수욕장이 집에서 가깝고(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가야 한다) 수심이 얕아서 안전한 해수욕장이다. 거기서 좀 더 의신면쪽으로 가면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이 나온다. 모세미 해수욕장이 지금도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이 꽤나 모이는 해수욕장이었다.
뜨거운 햇볕, 끈적이는 바닷물, 벌겋게 그을려 따가운 피부,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유료 샤워장, 머리카락이나 신발속의 모래알들, 천막형음식점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들, 이런 것들이 모세미 해수욕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어느 천막형 음식점에서 함께간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의 춤판이 벌어졌는데, 지루박, 탱고, 차차차와 같은 양춤을 추었다. 천막은 허리 높이까지 접혀 걷혀 있었고, 의자를 가장자리에 쭉 둘러놓았다. 춤은 천막의 중앙부에서 추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구경을 하다가, 자신의 순서가 오면 저연스럽게 나가서 춤을 춘다. 아버지도 거기에 앉아 계셨는데, 나와 동생은 천막의 바깥쪽에 있었다. 우리는 접혀 올라간 공간으로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뒷허리춤을 꽉 붙잡아 춤을 추러 나가지 못하게 했다. 동네 아저씨들이 “김약사님도 한번 추시죠”(아버지의 공식 직함은 ‘약종상’이었으나 김약사님으로 불리고 있었다)라며 춤을 권했으나 아이들이 뒤에서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결국 아버지는 춤을 추지 못했다.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허허, 이 놈들 봐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끝까지 아버지의 허리춤을 붙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약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이들만 해수욕장에 갔었던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