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의 부정맥질환 중 “WPW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 보고했던 세사람의 이름을 붙여 Wolff–Parkinson–White syndrome(WPW syndrome)을 이르는 말이다. 심장의 전기전도계의 이상인데, 정상에서는 없는 켄트섬유(Kent fiber 또는 bundle of Kent, 아래 그림 점선원)가 심방과 심실 사이에 존재하여 부정맥을 일으킨다. 이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40%는 전혀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증상은 주로 비정상적인 발작성 빈맥(abnormally fast heartbeat)이나 두근거림(palpitations)이 주증상이고, 경우에 따라 약간 어지럽거나(ligh-theadedness), 숨이 차거나(shortness of breath), 심한 경우 실신(syncope)을 할 수도 있다. 이것만으로는 심장정지(심정지)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WPW증후군에서 나타나는 빈맥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발작성심실위빠른맥(발작심실상성빈맥, paroxysmal supraventricular tachycardia, PSVT)이다.
WPW 증후군을 갑자기 블로그에 쓰는 이유는 내가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도 잊고 지냈었는데, 최근에 생각이 나서 적어 두는 것이다. 내가 처음 발작성심실위빠른맥(PSVT)을 경험한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발작성 빈맥은 갑자기 나타난다. 운동 등으로 심장박동이 올라가는 것과는 다르게 갑자기 빈맥이 발생한다. 나의 경우는 숨이 차거나 어지럽거나 하는 다른 문제는 전혀 없었다. 단지 매우 불쾌하고 불안한 생각이 드는 빈맥만이 나타났다.
빈맥은 짧게는 1~2분에서 길게는 몇시간 동안 지속된다. 보통 몇시간동안 지속된다. 드물게는 12시간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몇번은 24시간을 넘긴 적도 있었다. 그리고 빈맥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철렁하는 느낌과 함께 심박동이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이 순간도 빈맥이 발생할 때와 마찬가지고 매우 불안하고 불쾌한 느낌이 든다. 분당 120~150회 정도의 심방동이 느껴지다가 갑자기 70~80회의 정상 심박동으로 뚝 떨어지는 느낌이 심리적으로 매우 불쾌하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당시에 읍내에 있는 “자생의원”에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심전도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뒤로 계속 증상이 있어서 광주시내에 있는 유명한 내과에도 갔었다. 거기서도 정확한 진단이 내려지지 못했다. 심전도를 시행했지만 아마도 WPW 증후군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발살바조작(Valsalva maneuver)과 목동맥팽대마사지(경동맥동마사지, carotid sinus massage)에 대하여 배웠다. 빈맥이 발생하는 경우, 목동맥팽대마사지는 효과를 전혀 보질 못했고, 발살바조작은 간혹 빈맥을 멈추는 효과가 있었다. 나중에 중학교에 다닐 때는 발살바조작도 내 나름대로 방식을 터특했었다.
초등학교 때부서 나타난 이 증상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두세달에 한번 정도 나타났던 것 같다. 의과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도 나타났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대학에 조교로 있던 시절, 당시에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심장내과 교수와 대화를 하던 중 빈맥이 발생했고, 그 때서야 심전도(ECG)를 다시 하게 되었고, 전형적인 WPW 증후군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전도 상에서 WPW 증후군은 델타파(delta wave)가 나타난다(윗그림 오른쪽 화살표). 나의 심전도 그림은 한동안 전남의대 심장내과 시험에 출제되곤 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번이라고 제대로된 심전도를 해봤다면(심전도를 제대로 판독할 수 있는 의사를 만났다면), 발견했을 수도 있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빈맥으로 인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었다. 물론 그 시기에 발견했다면 오히려 치료의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심장내과 교수와 이 문제를 발견했던 때가 국내에 EPS(Electrophysiologic Study & Radiofreqency, 전기생리검사 및 전극도자 절제술)가 도입된지 얼마되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연세대학교병원에서 유일하게 EPS를 하고 있었고, 전남대학교병원을 비롯한 몇몇 대학병원에서 EPS 도입을 준비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진단이 내려진 후 아미오다론(Amiodarone®)을 복용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도 이 약은 고용량 복용시 폐섬유화 등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에 소용량을 복용하던 중 EPS를 하기로 했다. (아미오다론은 각막 색소침착증, 광과민반응, 간수치 상승, 정신신경계 이상, 폐렴, 흉막염, 서맥, 갑상선기능 저하증 및 항진증 등 다양한 부작용이 있는 약물이다.)
나는 1991년 6월 7일에 연세세브란스 병원(김성순 교수)에서 EPS를 시행한 후 전극도자절제술(catheter ablation)을 통해 문제의 켄트섬유를 제거했다. 그 과정에 대한 기억은 너무 생생하지만 여기에 적지 않는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그 뒤로 빈맥을 단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당시에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분만 2개월 전 정도) 아내가 간병아닌 간병을 하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가장 크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