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당’을 무시하는 이유

By | 2021년 1월 17일

샤마니즘이 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당시에 무당은 많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물론 당시에도 그것이 웃긴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무당의 존재가 신의 존재만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무당의 말 한마디가 그 만큼 영향력이 컸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당의 말에 귀를 귀울일까? 아직도 사주나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긴하다. 그들은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무당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무당의 말을 무시한다. 따라서 무당 자체도 무시한다. 나는 초등학교에 보았던 무당의 속임수를 알아차린 이후로 무당을 무시한다[관련글 보기]. 왜냐하면, 무당의 소리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무당은 종교를 통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다. 우리사회에는 무당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서 먹고 살아간다. 나는 여러차레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관련글 보기]. 따라서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동방정교회, 등) 안에 있는 성직자들을 종교인으로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는지 이제는 기독교 안에서, 특히 개신교 안에 있는 성직자들은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닌 종교인으로 바뀌고 있다. 그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쫒는 것이 아닌, 종교를 이용하여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돈과 권력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무당과 같은 종교인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성직자들이 있다. 나같은 일반인들은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그런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성직자들이 소수이긴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적 양심을 지키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그렇게 귀한 삶을 살아가기에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타락한 성직자들은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 그 역사의 반복은 종교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반복시켰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런 역사반복의 한복판에 와 있다. 성직자의 타락이 이미 절정에 다다랐기 때문에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되돌리기에는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교인들이 이미 세뇌가 되어버린 상태이기에 힘들 듯하다. 그들은 눈과 생각은 이미 교회 안에 갇혀 있고, 성직자라고 하는 종교인들의 생각으로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서 무당과 무당의 말을 무시하듯이, 무당이 되어버린 종교인들과 그들의 말을 무시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무당목사들이 해대는 적당하게 둘러대는 달달한 소리와 협박에 가까운 소리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과 관련이 없는, 단어만 성경에서 가져와서 무당이 할 소리를 해대는 목사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성직자라기 보다는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무당인 그들의 소리를 무시하라는 뜻이다.

온라인 시대에 우리는 성경중심의 건강한 목회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나 교육 환경이 같은 것은 아니기에, 그것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그런 이유로 귀에 쏙 들어오는 설교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유로 현상황이 어렵다.

아무튼 건강한 목회자와 건강한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큰 복이다. 그것을 분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가 목사인가? 무당인가?”를 구별해내야 한다. 교인 스스로 탐욕을 버릴 때, 건강한 목회자와 건강한 교회를 빨리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목회자나 교회도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것도, 완전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건강한 교회라고 판단했어도, 타락의 징조가 보이면 바로 떠나야 한다. 그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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