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16] 아버지의 외진

By | 2014년 9월 15일

아버지는 원래 의사가 꿈이셨다. 따라서 의학을 공부하셨다. 당시에는 “한지의”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의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도 의사국가고사를 봐서 합격하면 정해진 지역에서 의사활동을 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결혼 후에 군대에 다녀오는 사이에 이 제도가 없어졌다. 의대를 졸업하지 않으면 국가고사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의대졸업자 중에 국가고사에 탈락하면 구제해 주는 한지의 제도는 70년대까지 존재했다.

의사의 꿈을 접은 아버지는 다시 “약종상“에 도전하셨다. 약종상이란 “OO약방”이라고 간판을 내건 약국을 말한다. 약국은 약대를 졸업하고 국가고사를 통과한 약사가 운영할 수 있고, 약방은 약대를 졸업하지 않았지만 약을 취급할 수 있는 약종상이 운영한다. 이것은 “약종상·한약종상·매약청매상허가규정“이라는 법률에 의거하고 있다.

군대에 다녀온 아버지는 약종상으로서 약방을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에 차렸다. 약방과 약국의 차이는 둘 다 약은 팔 수 있으나 약방에서는 약을 조제하면 안된다.

그런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있던 약방은 약국의 역할 뿐만 아니라 병원의 역할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다고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읍내까지 가지 않고 간단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약방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아버지는 늘 “선생님”이나 “약사님”으로 불렸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면 “교장선생님이시냐?”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

집에서는 간단하 봉합수술도 했다. 그리고 동네에 분만 있으면 모두 아버지가 가서 분만을 도왔다. 때론 다른 마을로 가기도 했는데, 밤 늦게나 새벽에도 찾아와서 모셔가곤 했다. 모셔갔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버지가 오신 분들 자전거에 태우고 그 마을을 다녀오곤 하셨다.

이렇게 아버지의 업무 중에는 “외진”이 많았다. 밤늦은 시간에는 우리가 잠든 이후에 돌아오시기도 하셨다. 아니 아버지를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의료수준이 발달하고, 교통도 좋아지고, 읍내에 병원도 많이 생기면서 아버지의 외진은 없어졌다.

재미있는 일은 약방에 온 손님들 중 상당수는 외상을 하고 가셨다. 현금이 귀했던 시절이니 당연하다. 약방에는 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는 일일달력이 있었다(물론 제약회사에서 제공한). 거기에 꼬박꼬박 외상을 적으셨다. 물론 주기적으로 노트에 옮겨적었는데, 마을별로 잘 정리를 하셨다. 아버지의 이런 정리하는 습관은 후에 우리 형제들에게 전수되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외상을 받으러 다니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다. 물론 외상을 받으러 가면서 추석선물을 가져가곤 하셨다. 그때는 설탕이나 밀가루가 최고의 선물이었다)

약을 팔고, 약을 조제하고, 간단한 시술을 하고, 외진을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내가 의대를 다닐 때에도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던 점은 내게는 강점이었다. 이제 기초의학을 하는 내게 환자를 볼 일은 없지만, 아버지의 외진가던 모습은 내게 오래 남는 기억이다.

아버지가 공부하시던 일본어 해부학, 산부인과, 내과 교과서는 지금 내 연구실에 소장되어 있다. 아버지가 쓰시던 청진기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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