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제목이나 주제로 몇 개의 글을 썼다. ‘불편함’이 없는 ‘편함’을 추구하는 세상의 논리에서 “미학”이라니, 이게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나는 최근에 페이스북에 있는 “전주바울교회” 커뮤니티에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글을 계속해서 올린 바 있다.
- [2017.6.5.] “당신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이 화두를 바울교회에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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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7.] “당신은 회심(回心)을 하셨습니까?” 바울교회에 두번째 던지는 화두입니다.
- [2017.6.16.] 오늘도 화두를 던집니다. 우리에겐 “미래”가 있습니까? 지금 생각하는 미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2017.6.21.] 오늘도 불편해 할 수도 있는 화두를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 [2017.6.24.] 오늘도 생각해볼 거리(꺼리라고 발음하면 의미가 잘 전달되죠)를 하나 던집니다. 미끼죠. ㅋㅋㅋ “바울교회(바울센터 포함) 주차장내 주차문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2017.7.2.] 습도가 높은 주일 오후, 다시 주제 하나를 던집니다. “왜 신앙(깊이와 시간)과 인격은 비례하지 못할까요?” 신앙이 인격과 비례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그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은 페친들의 마음에 어떤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런 불편함을 느껴 보라고 화두를 던졌다고 보아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택한 족속이다. 그들을 향해(물론 내 자신을 향해서도) 이런 불편한 주제들을 던져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룩함을 쫓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닮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천이다. 그러기에 이런 화두에 대한 불편함을 감수하며 스스로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말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모습이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나와 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5장 24-26절은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씀해 준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2절에 있는 바울의 고백은 크리스천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은 당연히 불편함이 뒤따른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내 삶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삶의 시간들이지 않을까? 더우기 크리스천의 불편함은 단순한 불편함의 수준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 조목조목 말씀하시는 아픔이 뒤따른다. 더 나아가 성령의 숯불이 나의 죄 하나하나를 지져낸다. 그래야만 거룩함을 쫓을 수 있게 된다.
“불편함의 미학(美學)”인 셈이다. 마음속에 불편함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령을 쫓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