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교회는 지방도시에 있는 교회치고는 꽤나 큰 대형교회이다. 즉, 모이는 성도의 수가 그만큼 많다. 당연히 전문직 교인들도 많고, 그 중에 교수들도 많다. 그 교수들의 모임이 교수선교회(‘교회내 교수모임’이란 뜻.)이다. 물론 교수라고 모두 교수선교회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매우 자율적으로 활동을 하기 때문에 교수직함을 가진 성도 중 소수만 교수선교회에 참여하고 있다. 근 몇년간 멤버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오늘 교수선교회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실제로 나는 현재 교수선교회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교수들과 개인적으로 매우 친밀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선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우리교회 내 교수선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금 재고해 보자는 뜻이다. 물론 그 안에 있으면서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교수선교회를 떠나서 다시금 교회내 교수선교회에 대해 재고해 보자는 뜻이다.
“교수”라는 뜻을 위키페디아에서 찾아보자.
교수(敎授, 영어: professor)는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이나 대학원 등에서 강의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일반적인 교사는 고등학교까지의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하지만, 교수는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 외에 학문을 연구하고 새로운 이론과 주장을 가지고 논문을 발표하는 위치에 있다는 면에서 구별된다. 교수는 학자로서 학문의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하며,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발전적인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소명을 지닌다. 문자적으로 교수라는 단어는 예술이나 과학에서 주로 전문가로, 또 최고의 위치에 있는 선생이라고 공언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출처 : 한글 위키페디아)
교수는 대학에서 자신이 전공한 분야의 전문가이다. 이런 전문성 때문에 우리사회는 교수를 교수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수는 대학 안에서만 교수가 아니다. 교수는 사회적 책무성을 갖고 있다. 마치 대학이 사회적 책무성을 가져야 하는 것과 같다. 그 사회적 책무성이란 위의 정의에서 나타나는 것 처럼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발전적인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소명“을 갖는 것이다.
한국의 수많은 교회 안에서 “교수모임”은 과연 이런 사회적 책무성을 다하고 있을까? 다른 교회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우리교회내 교수선교회의 사회적 책무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된다. 지성의 요람의 주역인 대학교수들의 지성은 교회 안에서 믿음이나 겸손이라는 단어에 의해 모두 죽어버리는 현상을 경험한다. 그들의 날카로운 지성적 비판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들의 성향이 보수적이든지, 개혁적이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지성적 비판“이란, 사회에서 교수로서 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를 하는 지성인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 발전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특성상 담임목사에 의해 교회의 모든 운영과 목회가 좌지우지된다. 특히 대형교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균형잡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선 끊임없는 성찰과 비판을 통해 성경적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방관과 침묵이다. 특히 지성인인들의 침묵은 소름끼친다.
이러한 교회 내에서 지식인이나 교회내 직분자들(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의 교회의 부패와 잘못에 관하여 방관과 침묵을 하는 이유는 몇가지에서 비롯할 것이다.
첫째로, 문제를 일으키기 보다는 그저 조용히 넘어가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이다. 이를테면, 설교에 비성경적인 요소가 있거나, 또는 표절이 있을 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일반 성도가 얼마나 될까? 그나마 지성인이라고 하는 교수들이 훨씬 더 빨리 알아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간다. 그것이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 목회자에 대한 평신도로서의 잘못된 인식이다. 목회자가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교회 안에서 풀어가야 할 문제로 보지 않고, “목회자는 하나님이 직접 처리하신다.”라는 잘못 학습된 교회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인식은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스스로 부르면서 성도들을 학습시킨 결과로 보여진다. 일종의 우상화이며, 신격화이다.
세째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목사가 설교 중에 비성경적인 내용을 말을 해도 앵무새처럼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는 지성인들이 교회 내에는 생각보다 많다. 목사의 반기독교적인 언행에 대하여 바른 시각을 갖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지성인들이 많다. 문제인식 자체가 없으니 당연히 방관하고 침묵할 수 밖에 없다.
네째로, 가장 좋지 못한 이유로 자신의 개인적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침묵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교회 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비겁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이런 이유로 지성인인 교수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침묵하거나 방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 내에 교수선교회에도 이런 지성적 비판 능력을 상실했거나 갖추지 못하였다. 따라서 내가 교수선교회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교수선교회가 개혁적이어야 한다라는 뜻이 아니다. 보수적인 교수도, 개혁적인 교수도, 근본주의적 사고를 가진 교수도,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진 교수도, 진보주의적인 교수도, 모두 참여하고, 스스로 교회 내에서 교수로서의 소명을 다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수선교회는 교수인 교인들의 사교모임이 아니다. 친목모임도 아니다. 교회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비판(결코 비난이 아닌)적 사고를 가지고 노력하는 그런 모임이 되어야 한다. 그런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과연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우리는 교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교수선교회를 떠난다고 이 문제가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인 나로서는 내 스스로 나의 사회적 책무성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 글에 오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