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어 할 것이다.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일치하는 삶 말이다. 아예 그런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일정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갈등과 고민의 시작점이 바로 이 문제일 수도 있다.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생각과 실제로 자신의 행동에서 보여지는 비겁하거나 나쁜 행동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튀어나와 주어 담을 수 없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인간은 고뇌하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한 파스칼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지식의 높고 낮음이나, 경제적 부와 가난에 관계 없이 우리 인간은 늘 연약한 모습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거룩한 하나님과 비교되는 “죄인된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연약함과 죄성에 대하여 알고 있기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끝없는 노력을 하려고 한다. 떄로는 도의 경지에 이르려는 노력이나 자신의 죄를 덮을 만한 선행을 통해서, 때론 철학이나 종교를 통해서, 심지어는 과학을 통해서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벗으려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간단히 그런 것을 생각해 보자. 자신이 생각한대로 살고 있다면, 자신이 입밖으로 내뱉은 말대로 살고 있다면, 우리 인생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것이 인간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생각과 말, 행동의 일치에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한계에 부딪힌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죄성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단순히 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남들도 그렇게 한다고 변명을 해도 죄의 모습은 쉽게 자신의 삶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성경은 이야기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라고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23)”이라고 말이다.
인생이 뭐 별 것 있냐고 비아냥 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각 인생은 매우 소중하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생각이다. 그러기에 여러가지 모습으로 인생을 값어치있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행동이 생각이나 말과 일치되지 않는다고 자학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당연시하며 자만감에 찬 모습으로 살아가서도 안된다. 이런 연약한 인간이기에 오늘도 더욱 겸손하고 겸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질 수 있다. 절대로 그 분 앞에서 자신마져 속일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떄문이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이라고 말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겨보길 소망한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서 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제대로 보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분명한 기준이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다. 정해진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르고 일치하는 삶을 살아갈 때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이 행복해지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른 아침, 이런 글을 쓰면서 내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 보고 또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삶의 모습들을 그려보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을 잘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