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을 따라 고속버스 터미널 방향으로 운전하고 가는데 저 멀리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50대후반의 여성이 보인다. 미리 속도를 늦추면서 멀치감치 정지를 한다. 그리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모습을 본다.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은 바로 “오기스러운 당당함”이었다. 당당한 모습은 좋은데, 당당한 모습안에 오기스러움이 보인다. 운전자와 보행자간의 소통이 전혀 없는 대한민국 땅에서 느껴지는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것은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느낌일 뿐이다.
당당함이란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작을 때 보여지는 내면의 자신감이 밖으로 표출되는 모습이다. 골리앗 거인장수 앞에 섰던 소년 “다윗(David)”이 당당하게 섰던 것과 같다. 신체적 결함이나 약점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우뚝 설 때도 우리는 당당함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 당당함에는 상대적으로 작거나 약한 자신이 모습을 통찰하기 때문에 그 안에 “겸손”이나 “낮아짐”이 깔려있다. 호기나 오만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기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단순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의 모습에서 “오기스런 당당함”을 보았다고 굳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당당하게 살되 오기나 호기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말자는 뜻이다. 물론 한국의 운전문화에서 운전자와 보행자의 소통과 배려가 전무하다. 그런 사회에서 살다보니 보행자는 운전자에 대하여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고, 그런 배경에서 그런 모습이 나온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 삶의 모습도 상처위에 살아가는 모습이다. 안타까운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고 살아간다면 그런 모습을 굳이 느끼지 않아도 좋았을 뻔 했다.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이런 당당함은 존재한다. 직장에서의 당당함은 자신의 업무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당하지 못하고, 늘 비열한 모습이나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 서로 협력하는 시스템을 갖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늘 핑계거리를 찾는다. 성격의 문제가 아닌 “당당함의 부재”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내 자신에게 스스로 당당해야 한다. 내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당당함을 방해하는 것은 자신속에 있는 죄악이나, 비열함, 비겁함,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모든 생각이나 행동들이다. 이런 것들은 내 스스로의 당당함을 무너뜨린다. 내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