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가 꾸며가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꾸밀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생사화복은 역시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자존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꾸며갈수 있는 특권을 받은 창조물이다. 그 어떤 생물체가 할 수 없는 특권이다. 사회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고등척추동물들은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수준의 특권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을 꾸며가는 권리와 능력은 때로 우리의 삶을 어색하게 만들곤한다. “자연스럽지 못함”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스러움”의 반대말은 “부자연스러움”이 아닌 “억지스러움”이라고 표현될 세상의 모습들이 너무 많다.
자아와 교육을 통해 쌓여진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자연스러운 만남들이 있다. 그것은 사회의 인식을 뛰어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모습에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일반적인 판단으로는 정답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만남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만남에 어떤 함정이 없다면 그것만큼 자연스러움이 또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남녀 만남도 인위적으로 만들어간다. 사회적 지위와 교육정도, 신체의 조건에 맞추어 꿰맞추기식 만남을 주선하고 이윤을 창출한다. 물론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런 만남까지도 절대적 주권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버리고 억지스러움을 선택한 결과는 아닐까?
생물체인 인간에게 생물학적인 영역에서의 만남을 스스로 포기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뒤늦게 억지스러움을 통해 만남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요즈음 시대에 무슨 말이냐?”라고 따질 분도 계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의 세상을 보면 “억지스러움”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세상사가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부터 자연스러움보다는 그렇게 억지스러움을 통해 교육하고 있고, 어느덧 그 세대들이 성인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성인이 된 세대들의 삶이 내가 보기엔 결코 “자연스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오면서 “스펙중심의 인간”을 추구한 결과일까? 정말 혼란스럽다. 혹시 현대인들은 인간의 생사화복의 결정권자인 신에 대한 도전을 하고 싶은 것일까? 제2의 바벨탑을 꿈꾸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