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교실, 나와 친구들은 MBC 라디오 드라마 “손오공”을 흉내내고 있었다. 인기절정의 라디오 드라마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듣고 있는 드라마였다. TV가 별로 없던 시절, 라디오의 드라마는 우리에게 꿈과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였다.
“우랑바리 다라나 바로둥 무따라까 따라마까 쁘랴냐~ 오색구름 내려와라 야~~얍!”이라고 하면 “슈우~융”하고 구름이 내려왔다. 소리만 드렸지만, 우리는 오색의 찬란한 구름이 손오공의 발아래로 내려와 손오공을 태우고 하늘을 나른 모습을 그려냈다. 만화나 영화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가 만들어내는 손오공이었다.
호리병안에 잡혀서 몸이 녹아들어가는 손오공의 모습은 내 몸의 일부가 녹아들어가는 동일성도 경험하며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그렇게 손오공의 이야기에 빠져 있던 우리가 이제 직접 손오공이 되어보고, 저팔계, 사오정, 삼장법사, 그리고 나쁜 악의 무리들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지만 전날 들은 이야기를 똑깥이 재연하고 있었다.
온 교실이 난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렇게 놀던 우리는 화가이셨던 최인규 선생님이 그린 큰 그림들을 손대고 말았다. 우리의 손이 달 수 없는 높이에 걸려있는 세로로 긴 그림을 떨어뜨리고 일부가 찢겨 나가는 사고를 저지른 것이다. 교실이 너무 시끄러워 교무실에서 달려온 선생님이 그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찍기거나 떨어진 그림을 모두 구겨버리셨다.
반장인 나부터 그렇게 놀았으니 선생님께서 더욱 화가 나신 모양이다. 생각보다 심한 체벌은 받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화내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최인규 선생님의 눈에서 볼을 흘러 턱으로 내려오는 선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많이 늙으셨을텐데 건강하신지 모르겠다. 최인규 선생님은 당시에 학교에서 일하던 사무원 아가씨와 결혼했는데, 그 러브스토리는 우리사이에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뒤로 우리는 손오공 드라마를 재연하는 일은 교실에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