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엔 “경고문”이 많이 있다. 길을 걷다가도 “공사중 주의”라던가, 건물현관에서의 “미끄럼주의”와 같은 경고문이 참으로 많다. 우리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에도 “안전시설 안전검사에서 탈락”해서 보수중이고, 우리 옆에 있는 주공3단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주공3단지쪽으로 걷고 있는데 경고문이 붙어 있는 놀이터에 7살 정도로 보이는 3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고개를 들어 미끄럼틀을 쳐다보니 위에 있는 두 아이 중 하나가 “아저씨, 여기서 놀아도 되는거죠?”라고 묻는다. “아니, 위험하니깐 놀지마라고 적혀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먼저 놀지마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지나가고 있던 내게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답을 했을 뿐이다. 그 옆에 함께 있던 아이가 미끄럼틀을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내게 오더니 “우리 엄마가 놀아도 된다고 했어요”라며 내 몸을 떠민다. 떠밀지 않아도 지금 집으로 가고 있는 나를 굳이 흙묻은 손으로 자꾸 나를 밀어낸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한다. “안 위험해요. 놀아도 되요”라고 말한다. 물론 저 미끄럼틀이 지금 무너질 상황은 아니다. 이번에 대대적으로 아파트 놀이터를 점검했는데, 그때 부적합판정을 받은 것이다. 할말을 잃고 집으로 향하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참 말 안듣는 사회다’라고 말이다.
사회적 경고에 대하여 우리 사회는 반항하던 시절이 두번 있었다. 한번은 일제강점기때이고, 한번은 군사정권시절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매국이었고 친일이었으며, 그들의 말에 반항하는 것은 애국이었다. 군사정권시절에도 그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어용이었고, 그들에게 맞서는 것은 “민주화운동”이었다. 지금 그런 시절인가? 도대체 왜 사람들은 어떤 경고문을 무시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것일까?
“속도를 줄이시오”라고 쓰여 있으면 속도를 줄여야 한다. “어린이보호구역”라고 표기되어 있으면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 경고문을 잘 보지 않을 뿐 아니라 보고도 무관심하다. 결국 자신을 위한 경고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도대체 경고문이 붙어 있고, 접근금지끈으로 둘러놓은 놀이터에서 “놀아도 된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답답할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