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써온 글 중에서 자녀교육에 관한 글에서 “눈치”라는 단어가 꽤나 나옵니다. 부모들의 “일관성”, “합리성”, “교육에서의 역치의 중요성”, “부부의 친밀도의 중요성”, 등 많은 이야기에서 “눈치보는 것”이나 “눈치보게 되는 것”, 그리고 특히 “아이들로 하여금 눈치를 보게 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적은 바 있다.
“눈치”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네이버사전에서 발췌함).
-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
-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태도.
사람관계에서 “눈치를 본다는 것”은 결코 성숙한 삶의 태도는 아니다. 직장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는 것, 집에서 부모의 눈치를 보는 것, 학생이 교수의 눈치를 보는 것, 등의 모습을 예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세가지의 경우에 “눈치”를 대입시키면, 눈치를 보는 대상과 개체가 모두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관계일 때 훨씬 더 눈치를 보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번 MERS 사태에 대한 뉴스글에 달린 댓글 중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창피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보았다. 어떤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다른 나라의 눈치를 봐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눈치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위 세가지 경우에서 “왜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곰곰히 생각해 본다. 아니 화살을 돌려서 “나는 언제 눈치를 볼까?”라고 내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평소에 남의 눈치를 본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선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직장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일 것이다. “직장인으로서의 무능함”과 “객관성과 배려가 없는 상사” 때문이다. 소신있게 일하지 못하는 것은 주변상황, 특히 상사의 눈치를 살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능함으로 인해 눈치를 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가정에서 부모의 눈치를 보는 저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 원인을 부모와 자녀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자녀들이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거나 그것을 숨기려 하는 경우 부모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관성이 없거나, 억압적이거나, 감정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눈치를 보는 것은 원칙과 법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으로 성장해 과는 과정이겠지만, 부모의 성향 때문에 아이들이 눈치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에서 교수의 눈치를 보는 학생들이 있다. 교수들의 성격이나 표현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수많은 교수들을 접하는 학생들은 소신있게 행동을 하지 못한다. 특히, 의과대학에서는 반전체의 학습태도에 대하여 교수들이 민감하기 때문에 스스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가려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교수들의 눈치를 본다. 이를 테면 결석이 너무 많으면 교수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이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자체적으로 출석을 부르곤 한다. 다른 학과의 학생들이 “왜?”라고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의과대학에선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 학생들이 눈치를 보게 되는 경우 중에 일관성이 떨어지고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부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수들 중 그런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불특정다수에 대한 눈치도 존재한다. 자신이 옷을 고르면서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과 색상을 선택하는데 제삼자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아마도 오랫동안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제3자의 개입”에 대한 학습의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옷을 고르는 자녀를 향해 “그게 뭐냐?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 “다른 사람들이 좀 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남들이 욕할꺼야” 등 수많은 제3자의 개입에 대해 학습되어 왔던 결과가 아닐까 한다. 물론 자신의 기준을 제3자를 개입시킴으로서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제3자의 눈치를 보는 경향은 뚜렷하다. 물론 긍정적 측면의 “눈치”도 있다. 사회적 개체로서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거나 삶의 절제를 가져올 수 있다.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사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 생각해 본다.
나와서 살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이쪽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분명하다는 것 입니다. 문화의 차이겠지만 ‘대충, 알아서’ 이런 표현는 절대로 상대가 내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어중간한 표정을 지으면 상대는 이 사람은 자신감이 없다고 느낍니다.
자신감의 부족에서 눈치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떳떳하고 남 눈치 보지 않고 사는 모습이 좋아 보이더군요.
남은 신경 쓰질 않고, 대신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살기.
말씀처럼 ‘소신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네요.
>> 케이프타운에서
소신껏 살되, 피해를 주지않고,
서로를 배려하고, 타협점을 찾는 훈련되어 있는 문화가 부러워보입니다.
“눈치없이 행동한다”라는 핀잔은 우리 사회에 너무 깊숙히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