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자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몇년 전일이다. 전주에 살면서… 그것도 크리스천인 제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서울에서 온 두 선교사를 모시고 방문하였던 “ㄱ”자교회를 올해 삼일절에 다시 찾았고, 며칠뒤 주말에 아내와 함께 다시 찾아가 보았다.
조덕삼장로와 이자익목사의 이야기는 이미 책으로 출간되어 있다. 오늘날과 다른 사회적 분위기에서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는 인터넷을 뒤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래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한 것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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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화마을에 이 마을 제일의 부자였던 조덕삼 씨와 조 씨의 마부였던 경상도 남해 출신 이자익 (당시 17살)머슴이 살았다. 당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남해에서부터 걸어서 김제까지 온 소년 이자익의 총명함을 알아본 조덕삼 씨는 그를 마방의 마부로 일하게 했다.
조 씨와 이 씨는 같은 날 테이트(한국명 최의덕)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조 씨는 자기의 사랑채를 교회로 내주었으니 오늘날 금산교회의 시작이다. 그뿐 아니라 조씨는 비록 자신이 부리는 머슴이지만 이자익을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신앙생활도 같이했다.
조덕삼, 이자익이 함께 예수를 믿은지 3년이 지난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 장립 투표를 했는데 묘하게도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신분의 양극화가 뚜렷했던 그 시절, 주인과 종이 경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놀라웠다. 이자익이 주인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술렁이는 성도들을 향해 조덕삼이 겸손히 말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살림과 행정, 설교를 맡아서 함)는 저보다 믿음이 더 깊습니다. 그를 뽑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자익은 장로가 된 뒤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교회 강단에서 설교했고,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성실히 섬겼다. 조덕삼은 자신의 종을 장로로 섬겼을 뿐 아니라,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됐다.
후에 이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자고 적극 나섰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정성으로 섬겼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자익 목사 역시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봤고, 세 번씩이나 교단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으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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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자꾸 이런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는 것 같다. 바쁘게만 살아온 인생을 다시금 생각하고 앞으로의 삶을 다시 계획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기도 한다. 내 자신을 더욱 겸손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이런 역사적 이야기를 기록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