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에 대한 소고

By | 2016년 9월 3일

다섯 아이가 있다. 이 아이들에게 빵을 똑같이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이 평등일까? 물론 하나씩 정확하게 나누어 주니깐 공평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공평은 빵을 받는 아이들의 상태가 똑같을 때 맞는 말이지 않을까? 다섯명의 아이들은 일단 체격이 다르다. 크기 큰 아이, 작은 아이, 중간 정도 하는 아이,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아이, 적게 나가는 아이, 등 신체적 조건이 다르다. 또한 식성이 다르다.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픈 아이, 배가 부른 아이, 또한 빵을 좋아하는 아이, 꼭 쌀밥을 먹어야 하는 아이, 등 식성이나 지금의 공복에 대한 상태가 다르다. 또한 특별하게 밀가루에 알러지가 있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각자의 배경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는다면 다섯아이에게 똑같은 빵을 주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획일적 제공에 의한 “불평등”이 발생한다. 분명히 평등하게 나누어 주었다고 말하지만 각자에겐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이런 문제가 흔하게 발생한다.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말이다. 그 대상이 사람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 중에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다. 사회적으로 약자가 존재한다. 특히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하고, 또 적용된다. 밀림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렇다고 약한 동물들이 몰살당하지는 않는다. 양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지만, 정글은 그 균형을 유지한다. 자연은 그렇게 디자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다르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그것을 깨는 일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하는 동물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옛부터 인간사회는 약자를 돕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노인을, 과부를, 고아를, 병든 자들을 돕도록 하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이다. 동물들처럼 그저 강자가 약자를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약자를 도와줌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때로는 강자가 약자를 위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인간 존재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

인간은 인간의 삶과 존재에서 “가치”를 추구한다. 단순히 힘이 쎈 자가 강자가 아니다. 때로는 권력을 가진 자, 부유한 자, 배운 자 등이 강자가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선 바로 전문가 집단이 그런 강자라고 할 수 있다. 때론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도 강자가 되고, 경제적으로 상위에 있는 자들도 강자가 된다. 우리 사회의 강자는 각 분야에 존재한다. 각 분야에서의 강자의 존재는 우리 사회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된다.

그런데 각 분야에서의 강자들이 스스로 “인간의 가치”를 훼손할 때, 인간에서 동물로 바뀌는 것이다. 자신의 이런 사회적 힘을 이용하여 약자들을 누루고, 착취하는 것은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회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주된 목적이 이런 각 분야의 강자들이 되기 위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렇게 강자들이 되고 난 이후에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개인의 권력과 부를 위하여 약자들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다. 각 인간에 따라 다르게 만드셨다. 각 인간의 신체적 조건도 다르고, 정신적 조건도 다르다. 더우기 이 땅에서의 각자의 환경도 모두 다르다. 획일적인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들로 하여금 조화를 이루도록 살게 하셨다. 동물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살라고 하셨다. 어찌보면 불평등하게 만든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물과 인간을 분명하게 다르게 만든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드셨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그런 가치를 추구할 만큼 똑똑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각 인간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한다. 태어나면서 부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가치를 지닌 피조물로 태어났다. 스스로 그 가치를 버리지 않은 이상에는 말이다. 다섯아이에게 똑같이 빵 한개씩을 나누어 주는 것이 평등이 아니다. 모든 아이게에 공평하게 하나씩 주었다고 우기면 안된다. 모든 아이들에게 같은 조건으로 주었다고 말해도 안된다. 더우기 다섯아이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었다고 항변해도 안된다. 다섯아이의 빵을 받기 전 조건에 이미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의 상황에 맞도록 빵을 제공하는 것이 평등이다. 이런 원칙은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적용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평등이다.

현대 사회는 태어나면서 갖는 불평등인 계급사회는 아니다. 인간의 존엄과 권리, 인격, 가치, 행복의 추구 등에 대하여 평등이 적용된다. 그러나 다른 DNA를 갖고,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평등함은 없고 불평등이 존재하게 된다. 즉, 형식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한 것이다. 따라서 인격을 갖는 인간은 스스로 평등과 불평등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존재이다.

이런 인간의 가치를 잘 적용하는 것이 창조주에 의한 인간 창조목적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성숙한 사회가 되길 소망해 본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