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잊은 요셉

By | 2017년 4월 30일

요셉과 꿈에 대해 “비전의 사람 요셉”, “요셉처럼 꿈을 꾸어라”, “꿈을 꾸는 요셉”, “꿈의 사람 요셉” 등 수많은 제목들이 붙는다. 수많은 글이나 설교에서 공통된 점은 “꿈을 꾼 요셉이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았던 이유로 그 꿈이 이루어져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이다. 그가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뜨려 죽게 되었던 것, 그리고 한 형의 제안으로 애굽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 간 것,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산 것,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게 된 것, 술 빚는 관원의 꿈을 해석해 준 후에도 풀려나지 못하고 그대로 감옥에 있게 된 것, 등의 사실은 과연 요셉이 어렸을 때의 꿈을 계속 비전으로 간직하며 살았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나는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서 살던 시절에는 자신이 꾸었던 두 번의 꿈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설사 생각을 했더라도 그것은 허황된 꿈이라고 단정했었을 수 있다. 왜냐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자신의 현실은 그 꿈과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던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42장 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영어성경(KJV)에도 “And Joseph remembered the dreams which he dreamed of them, and said unto them, Ye are spies; to see the nakedness of the land ye are come.”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42장 6절에 그의 형들이 찾아와 총리인 요셉에게 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모습을 보고 요셉이 어렸을 때 꿈이 생각났다. 그동안 까막득히 잊고 있었던 꿈을 그제서야 생각해 낸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온 이 후에 한번도 그가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을 생각하거나 기억해 냈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어렸을 때 꿈을 기억하기 때문에 적어놓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그 형들이 와서 절을 하는 시점에서 그가 꾸었던 꿈을 생각해 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의 섬세한 간섭하심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를 애굽에 총리로 세우셨고, 그 땅에 큰 이스라엘 백성을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400년이 흐른 뒤에 모세를 통해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랑하시고 역경 후에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운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요셉의 “정직”과 “성실”의 성품에서 비롯한다고 보고 있다. 요셉이 어리긴 하였어도 10대 후반의 행동을 보면 그는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으며, 형들의 문제를 고자질하는 그런 아이였다. 물론 형들의 계략으로 웅덩이에 빠져서 죽을 수 있는 상황을 겪고, 또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 애굽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과정에서 그는 엄청난 죽음의 공포와 형들로 부터 버려지는 비극적인 배신의 슬픔을 겪게 되었다.

아무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었던 요셉은 아마도 아버지로 부터 물려 받은 신앙이 애굽에서 되살아 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신앙적 바탕이 그로하며금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던(물론 자신의 아내의 말에 근거한) 그를 감옥에 넣었던 보디발도 그를 계속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죽이거나 노예들이 가는 감옥으로 보내지 않고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보냈으니 말이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그는 성실하게 일을 했고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요셉의 삶에서 단순한 인간적 신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보았다(창39:3). 따라서 보디발은 그의 모든 살림을 요셉에게 맡기는 단계가 될 정도로 신뢰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요셉에게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성실함과 정직함이었다. 물론 야곱으로 부터 물려받는 좋은 머리도 있었을 것이다. 돈은 성실하고 정직한 자에게 맡기는 법이다. 그런데 그에게 살림살이와 관리를 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창39:23)라고 기록하고 있다. 술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고, 자신의 억울함을 이야기했으나 그 관원은 풀려난 이후에 요셉의 부탁을 잊어 버렸다(창40:23). 만 2년이 지난 후에 왕의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없자, 그 관원이 요셉을 생각해 낸다. 과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후에 요셉은 어떤 생각으로 2년을 살았을까? 그 사이의 기록은 없으나, 예전과 같이 죄수의 몸이었지만 감옥의 관리하는 일을 계속해서 성실하게 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셉은 약간 이전에 비하여 정신적으로 힘든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그 관원이 자신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계속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41장 14절에 왕이 꿈 해몽을 위해 감옥에 있는 요셉을 불렀을 때, 요셉이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 입고 왕에게 간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곧 풀려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면 늘 수염을 단정하게 깎고 출옥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럴 가망성이 없으니 수염을 깎지 않은 채로 허름한 죄수복을 입고 지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감동의 크라이막스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요셉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단순히 꿈을 꾸고 그 꿈이 비전이 되어서 살았던 삶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어찌보면 그 꿈마져도 까마득히 잊고 지내야 할 만큼 요셉의 삶은 혹독하고 처절했을 것이다. 노예로서, 죄수로서 살아야 하는 수 많은 인생의 시간 속에서 그가 자신의 형제들이나 부모들이 절을 할 만큼의 위치에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꾸었던 그 꿈은 자신의 현실과 전혀 맞지 않은 헛된 꿈으로 생각하고,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되어진 후에서야 비로서 “그 꿈을 생각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미래를 꿈꾸지 못할 수준의 처절한 노예와 죄수의 삶 가운데 잊고 지냈던 꿈을 애굽의 총리가 되고나서, 흉년이 계속되던 때에 자신에게 와서 절하는 형제를 보고서야 비로서 그 꿈을 생각해 내었던 요셉의 삶은 “요셉처럼 꿈을 꾸어라”라고 주문하는 것은 한번쯤 깊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작년에 써 두었던 글 하나…

요셉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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