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다. 최소한 지금의 상황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쓰는 이유는 사람들이 글을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교회(敎會, Christian Church)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다.(출처 : 위키페디아)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한사람 한사람이 아닌 그들의 공통체를 이루는 것이, 공동체를 이룬 이유는 공동체를 통한 어떤 기능을 하기 위함이라고 봐야 한다.
공동체인 교회는 교회를 이루는 각 구성원(성도)들을 통해 “예배와 선교, 교육, 섬김, 사귐(돌봄과 나눔)”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의 큰 다섯가지의 기능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본적인 기능들이 조금씩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조금씩 왜곡을 시켜놓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그것이 본질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교회는 네가지의 속성을 갖는다. 이 네가지의 속성을 가지지 못하거나 왜곡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교회가 아닌 것이다. 위키페디아에 있는 내용을 가져온다.
교회의 네 가지 속성 또는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은 기독교를 나타내는 특유의 주요 특징 네 가지인 하나인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된 교회,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한데 묶어 일컫는 용어이다. 교회가 이러한 네 가지 속성 내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은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제정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신경에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짓는 구절이 나온다.“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이 네 가지 속성은 교회와 교회 사명의 본질적 특성을 나타낸다.
즉 교회의 특성 혹은 속성을 잘 갖추고 있는 교회인지, 그 속성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를 쓰는 교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런 속성을 역으로 이용하거나 왜곡하는 교회는 교회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의 첫번째 속성은 하나라는 “통일성“을 갖는다. 교회는 하나이다. 교회는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의 세례로 태어나며, 오직 하나의 몸을 이루고, 하나뿐인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의 두번째 속성은 “거룩성“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웠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거룩하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쳤으며, 거룩한 성령이 교회에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의 세번째 속성은 “보편성“이다. 하나님이 광활한 우주 어디에나 계시고, 교회는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진다. 또한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하기 때문에 다양한 국가와 사회와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환경 속에 사는 성도들이 같은 신앙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참된 교회의 네번째 속성은 “사도성“이다.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과 전통을 토대로 세워졌고, 계승되어 왔다. 따라서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는 열두 사도가 가르친 것과 똑같은 복음과 교리를 가르친다.
이러한 네가지 속성이 변질되거나 왜곡되거나, 이 속성을 감추는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한국교회가 교회가 되려면 이 네가지 속성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이 속성을 잃었던지, 잃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계모임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게 된 배경의 중심에는 “목사”가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요즈음 한국교회를 보면서 고려후기의 불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지금의 왜곡된 교회본질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안개가 걷히지 않기를 바라는 곳,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습니다.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되돌려 놓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는 누군가를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한데 어찌해야 할지 저로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이 상태로 가야만 하는 것
사랑하는 조직이 멍들어 있는데 그 속에서 지내야 하는 것
아 모두 마음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조상들이 “인생은 고해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댓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