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장외전을 하세요?”
최근에 들은 말이다. 장외전(場外戰)의 본래의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난 의미로 우리사회에서 통용된지 오래된 단어이다. 언어의 사회성 때문에 아무튼 장외전이라고 치자. 이런 질문을 받을 때에는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교회 밖에서 싸우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나?’라고 생각했다가, ‘그렇다면 내가 싸움꾼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정신이 번쩍든다. 정말 나를 싸움꾼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계속 교회 밖에서 교회랑 싸우고 있는 것일까?
‘내가 교회랑 싸울 일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나는 교회랑 싸우고 있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는 불의와 싸우고 있다. 나는 비신앙과 싸우고 있다. 나는 비본질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거짓과 싸우고 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이렇게 따지는 분들이 있다. 그 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말이다. 문제인식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이미 왜곡된 본질을 본질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문제이고, 샤마니즘을 신앙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문제이고, 거짓을 진짜로 속고 있는 것이 문제이고, 불의를 보면서도 그것이 불의라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더우기 더 큰 문제는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개선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담임목사 뿐만 아니라, 부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교회장로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목사들보다 더 큰 책임이 장로들에게 있는 것이다.
나는 장외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회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일단 장로휴무 중이기도 하고 코로나로 인해 직접적인 교회출석을 미루고 있다. 그런데 당회에 들어와서 나의 생각을 펼쳐야하지 않냐?라고 말하는 장로들도 있다. 그 분들에게 꼭 이런 말을 하고 싶다.
2년 전에 장로들이 당회에서 보여준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 때 어땠었는지 기억하는가? 이미 편이 갈라져서 각자의 이익을 쫒아 다수의 의견으로 끌고가지 않았는가? 때로는 다수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지만, 소수의 의견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그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과연 바울교회 당회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해 보길 바라는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여서 피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구성원으로 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늘 반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지금 구성원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한다면 끝장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의한 의견에 “투표합시다. 투표!”라고 외치며, 다수의 의견대로 결과를 내었던 당회를 기억하는가 말이다. 그 이후로 개혁의지를 갖고 있던 장로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가! 잊었는가? 이 사실을.
나에게 “장외전” 언급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청춘을 바울교회에 바쳤다. 그 만큼 바울교회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밖에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교회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바울교회의 치부를 외부에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가?
내가 침묵하면 스스로 개혁을 할 것인가?
2년 가까이 지켜보고 있다. 더 지켜보려고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개혁의 분위기라도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장로들을 바라보고 있다. 성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성도들은 감투나 쓰고 거룩(?)한 모습으로 치장한 장로를 원하지 않고 있다. 교회의 불의에 대하여 앞장서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애쓰는 장로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나에게 더 이상 “장외전 하지 말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안다면 말이다. 겨우 조그마한 교회건물 하나를 가지고 교회 어쩌고 저쩌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지구상의 교회는 딱 하나이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말이다. 우리교회, 니네교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작고 초라한 교회들도 모두 우리 교회이다.
열받아서 적는 글은 아니다. 그냥 토요일 오후에 생각이 나서 적어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