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다”의 사전적 의미는 ‘억지를 부려 제 의견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다.’이다. 언제가부터 우리사회 안에는 “우김”이라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뭐든지 우기면 된다고 생각하는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소비자의 과실이 명백해도 소비자가 우기면 들어주어야 하고, 공급자 또한 우격다짐으로 소비자를 윽박지른다. 그러니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신뢰는 없고, 늘 대치와 우김만 존재하는 느낌을 준다.
간혹 청와대 민원창구인 “국민청원”에도 어의없는 글들이 올라온다. 읽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래서 어쩌라구!”이다. 그 옛날 신문고를 쳐야만 했던 그런 청원건이 아니라면 올리지 말아야 할 사연들이 올라오곤 한다. 모두 “우김문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진짜 억울한 사연들이 있다. 사회적 이목을 집중하지 못하더라도 정말 분하고 억울한 사연들은 거기에 당연히 올리는 것이 맞다. 현시대의 신문고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김의 문화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냥 우기면 된다. 우겨서 자신의 이익을 얻은 경험들이 쌓이면서 이미 학습된 탓에 우김은 끊이질 않는다. 우김의 순작용은 “예상되는 것에 대한 예방적 행위”를 가져오기도 하고, 역기능으로는 “방어적 태도”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두 순기능과 역기능은 결국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셈이다. 방어적 태도가 발생할 일에 대한 예방적 차원에서 비롯하고 결국은 소비자 중심이 아닌 공급자 중심의 방어기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한 때는 노조파업은 사회가 동조하는 일종의 “우김”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노조파업은 사회가 외면한다. 왜냐하면, 처음 우리사회에서 보여주었던 노조파업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는 노조파업을 그렇게 보질 않는다. 정말 파업이 필요한 노동자들은 사회의 이목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한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절에는 독재정권에 맞선 민중의 “우김”이 있었다. 그 우김에는 “공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동조를 얻어냈고, 결국 이 사회는 민주화를 이루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의 곳곳에서 보여주는 “우김” 현상은 결코 건강하지 않은 우김이라는 생각이 든다. “급발진”이라고 하는 사고의 경우에서도 “우김”으로 인해 결국 제조사에게 좋은 반격꺼리를 가져다주고 말았다. 실피해자들마져도 그냥 우기는 운전자로 만들어버렸다. 공익을 우선하는 우김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한 우김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이런 우김에 대한 비판적(비난적이 아닌) 시각을 갖고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이익을 위한 잘못된 우김에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이런 생각에 휩싸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