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페이스북이나 오프라인 강의에서 웃자고 던지는 이야기 중 하나가 “교수는 딱 두 종류만 있다. ‘이상한 교수’와 ‘더 이상한 교수’로 말이다.”라고. 아마도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김형태 교수는 교수를 이상한 교수와 더 이상한 교수로만 분류한다. 정말 김형태 교수는 이상한 교수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오해는 하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교수로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은 교수를 어떤 관점으로 볼까? 아침식사를 하면서 정치패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 생각을 하면서 “교수”를 떠올렸다. 내가 늘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이상한 교수’가 바로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수의 3대 의무는 “교육”과 “연구”, 그리고 “봉사”이다. 일반적인 직업윤리를 뛰어넘는 직업 중 하나가 교수이다. 그만큼 사회적, 국가적, 개인적 책임이 교수에게 있는 것이다.
교수가 되기 위하여 단순히 많이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교수들은 사회에서 일할 “전문직업인을 양성하는 교육”을 하는 교육자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교육에 대하여 생각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문직업인으로 살아갈 대학생들에게 걸맞는 교육환경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 끊임없는 연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윤리이다. 단순히 자신의 업적을 위해 연구를 하다보면 연구윤리를 저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교수들의 연구업적은 자신의 업적을 넘어, 그 연구결과가 적용되는 세상에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약품이 만들어졌을 때 그것에 대한 검증을 교수가 제대로 해주지 않았을 때의 사회적 및 개인적 파장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가 바로 ‘연구윤리’이다.
그리고 교수의 의무 중 하나가 바로 “봉사”이다. 사회적 봉사를 의미한다. 교육과 연구를 통한 봉사가 크긴 하지만, 교수로서의 갖춘 학식과 덕목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봉사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방송출연이다. 단순히 그 방송의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출연이 아닌 시청자들에게 교수가 가진 지적 권위를 통한 진실을 전달해주기 위한 방편, 즉 자문자로서의 출연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의 부작용이 크기 때문에 교수들은 그것을 선별할 능력도 필요하다. 또한 저술활동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학문에 대한 것들을 사회에 늘 전달해야 하는 의무도 교수에게 있다.
따라서 교수가 3대 의무를 지키며 교수로서 살아가려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즉, 세상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를 버려야 한다. 돈과 권력에서 멀어져야 한다. 즉, ‘이상한 교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남들이 다 추구하는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 나아가, 때로는 이를 뛰어 넘어 남들이 가지 않는 고난의 길로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때론 “더 이상한 교수”가 되기도 한다.
나는 “교수의 삶은 성직자의 삶 같아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즈음 성직자의 이미지가 추락해서 이런 표현도 곤란하다고 보는 세상이 되어 씁쓸하지만 아무튼 교수의 삶은 그래야 한다. 교수들의 사회적 시선이 예전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왕 교수로 살아가는 것, 좀 더 멋지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사회적 봉사자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거기에 스스로를 늘 살피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이상한 교수’, 더 나아가 “더 이상한 교수”가 되는 삶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한다.
이것이 내가 보는 “교수에 대한 관점”이고, 또한 “내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