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간혹 나를 치켜세울 때에는 “사커대디”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특히 아들들 앞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는 사커대디가 아니다. 진정한 사커대디는 따로 있다.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진도라는 작은 섬에 살던 시절에, 읍에 사는 것도 아니고 면단위에서 살았던 시대에 내가 초등학생 때에는 가죽으로 된 축구공은 오직 학교에서만 만질 수 있던 시대였다. 개인이 가죽축구공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당시에 축구에 푹 빠져있던 나는 아빠에게 가죽축구공을 사달라고 했고, 아버지는 읍내에 나가 축구공을 사오셨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개인적으로 글로브를 갖고 싶었을 때에도 곧바로 사주셨다. 지금의 2~30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아버지 세대들에게 물어보면 알 듯하다.) 당시에 개인이 가죽글러브, 그것도 선수용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무튼 그 야구 글러브는 지금도 갖고 있다.
그리고 의대를 다니던 시절에 드럼에 푹 빠져있던 내게 아버니는 드럼을 선물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아버지는 진정한 사커대디이셨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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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어둔 가죽 축구공은 선물받은지 며칠 후에 동네 길가에서 축구를 하다가 그만 탱자가시에 찔려서 빵꾸가 나고 말았다. 수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 일단 가죽신발을 만드는 구두가게 아저씨에게 가서 육각형의 가죽 피스 하나의 실밥을 풀었다.
- 그리고 자전거 가게로 가져갔다. 거기에서 가죽 속에 있는 고무 튜브의 펑크를 수리했다.
- 다시 구두점 아저씨에게 가져가서 실밥을 뜯은 부위를 다시 꿰맸다.
- 그리고 다시 자전거 가게로 가서 바람을 넣었다.
오늘 학교에서 어떤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커대디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김에 적어 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