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도 둘째 아들과 대화에서 얻은 것이다.
학습에 있어서 “자율권“은 매우 중요하다. “자율“의 사전적 의미(출처:네이버사전)는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는 일. 또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절제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철학에서는 ” 자신의 욕망이나 남의 명령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객관적인 도덕 법칙을 세워 이에 따르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제목을 “고삐를 풀어주어도 되는 말(馬)이 되라“라고 붙여보면서 써커스단의 코끼리를 떠 올렸다. 작은 줄 하나에 묶여 있지만 어렸을 때 부터 속박에 훈련된 채 얌전하게 있는 꼬끼리 말이다.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뜻으로 “고삐(reins, bridle)”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 교육은 늘 자율 대신에 속박과 억압의 방법으로 운영되어 왔다. 말이 자율학습이지 어디까지나 타율학습이요, 속박학습이었다. 절대적 학습시간을 늘리기 위하여 학교는 그런 방법으로 학생들을 길들여왔다.
문제는 그 학생들이 대학에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본다면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알 수 있다. 인생의 목표가 대학가는 것인 세상이긴 하지만, 정작 학문이 이루어져야 할 대학은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율이 아닌 방종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 있는 어느 대학이나 비슷한 성향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주 열심히 학문에 몰두하는 학생들도 많겠지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나의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길 소망해 본다.
“자율“은 거기에 따른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그 누구의 속박을 받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떠넘겨서도 안된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절제하는 일”을 자율로 본다면 그 통제와 절제라는 “질서“속에 자신을 넣는 것이다. 그 질서가 깨질 때 자율은 깨지고 방종과 혼란이 난무하게 된다. “스스로의 원칙에 따르는 질서“가 자신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내 자신에게 간혹 묻는다. ‘아니, 이들이 성인이라고 하면서 왜 유치원생 다루듯이 하지?’라고 말이다. 그러면 대답이 되돌아온다. ‘스스로 못하잖아’라고. 난 학생들을 성인으로 존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자율적 학습”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난 “억압”과 “속박” 상태로 그들을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한다. 실제로 학생들의 자율성은 굉장히 떨어진다.
예를 들어 “PBL”을 보자. 이 과목의 특성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학습”이다. 여기에는 스스로 자료를 수집하고 이것을 토대로 서로 의견을 나누어가는 과정이다. 문제는 이 과목의 평가가 “Pass” 또는 “Fail”이다. 결석만 하지 않으면 모두 패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이유로 PBL은 매우 형식적으로 진행된다. 교수들마져도 이 과목에 대해 회의적이다. PBL이 최고의 학습방법이거나 망할 놈의 학습방법이 아니다. 새로운 학습형태이고 또 이 학습을 통해 의사로서의 역량을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학생들의 자율성 없음”이다.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것을 포기한 것이다. 의학은 학점만 따면 되는 학문이 아니다. 70점만 넘으로 되는 과정이 아니다. 의학을 다 알아야 하는데 하는 수 없이 90점도 맞고, 80점도 맞고, 70점도 맞는 것이다. 지식없음에 대하여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75점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책에 있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공부하는 방법에 따라 지식이 많아도 좋은 점수를 못받을 수 있는 것이 의학공부과정이다. 일반인의 이해를 돕고자 첨언함.). 그럴 용기도 기백도 없는 경우가 많다. 간혹 그런 분위기를 벗어나 소신 껏 공부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누군가 나의 고삐를 붙잡고 있지 않아도 스스로를 다스리며 학습할 수 있는 철학적 양심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해 본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