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은 지금보다 나은 인생을 꿈꾼다. 그런데 “더 나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부자가 된다는 것? 큰 집에서 산다는 것?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 자식이 잘 되는 것? 명성을 얻는 것?… 과연 이런 것들이 더 나음에 속하는 것일까? 이런 것들도 더 나음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상대적이라는 데 있다.
절대적 가치기준의 “더 나음”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을 “인생에서의 성숙”이라는 생각을 하곤한다. 육체는 완성이 되는 순간부터 늙어간다. 내 마음대로 육체가 움직여주지 못하는 것은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부터 나타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회적 성숙이나 육체적 성숙도 결국은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음”에 다가가기엔 오히려 장벽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내면의 성숙”이란 절대적 가치기준의 “더 나음”을 말이다. 간혹 내 스스로 내 자신이 많이 변해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철없던 시절부터 내 삶을 돌아다보면 말이다.
내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너 많이 컸구나!’라고. 흠많고 죄많던 인생에서 이제는 좀 더 나음의 세계를 맛보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나보다 더 어른들이 본다면 ‘그래 너 철 많이 들었구나!’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제는 좀 더 철이 든 듯 하다.
나는 인생을 그리 어렵게 살지 않았다. 좋은 부모도 만났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내 스스로 내 자신이 그런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음에도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잘못을 저질러 왔던가? 돌이켜 보면 철없는(철딱성이없는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 시간들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을테고 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비난의 소리를 했을지도 모를 그런 실수투성이의 인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착하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음에도 말이다.
나는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 들었다. 이제는 철도 많이 들었다. 세상을 볼 줄 아는 시각도 가졌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보이게 되었다. 후반기를 살아가는 내 인생을 좀 “더 나음”의 인생이 되도록 해보자는 것이 요즈음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나의 내면을 더 살찌울 그럴 투자들이 필요하다. 물론 아직도 하고 싶은 수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것들 중 정말 더 나음을 위한 것들을 선별하고 행해야 하는 의무가 내게 있다.
더욱 더 겸손한 자로 살아가고 싶다. 더 감사하면서 살고 싶다. 더 배려하면서 살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 더 많은 책들을 읽어야겠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며 살고 싶다. 이런 삶이 후반기를 살아가는 내 인생의 “더 나음”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