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국이나 나의 나라하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나라”라고 표현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 마누라”” “내 아내”가 아니라 “우리 마누라”라고 말한다. 외국인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표현이다. 공동체적 감정이 강한 우리에겐 익숙한 표현이다. 물론 “내 동네”보다는 “우리 동네”라던가, “내 교회”가 아닌 “우리 교회”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표현도 있지만, “우리 마누라”의 표현은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그리고 강한 표현 중에 “내 자식”, “내 새끼”라는 표현도 있다. 이번 설명절동안 많은 운전을 했다. 자동차들이 도로에 쏟아지면서 이곳 저곳에서 정체를 이루었고, 덕분에 자동차 뒤에 붙어 있는 스티커들을 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 중 초보운전 등의 표현을 빼고 “차안에 어린 아이가 타고 있다”를 표현하는 스티커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스티커들을 보면서 유독 눈에 들어온 단어가 “내 새끼”라는 표현이다. 거기에 “소중한”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내자식=소중한 존재”라는 표현들이다. 자기 자식이 소중하지 않은 부모는 없다. 정말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 자식들이 아니던가?
그렇다. 자신의 자식들은 다 소중하다. 결국 모든 아이들은 다 소중하다. 그렇다면 답은 쉽게 나온다. 모든 아이들이 소중하기에 내 자식도, 남의 자식도 모두가 소중한 것이다. “나의 것”, “내 것”일 때는 소중하게 다루고, “남의 것”, “남의 물건”일 때는 대충, 아니 험하게 다루는 우리의 문화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소중한 내 새끼가 타고 있다”라고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공공장소의 물건들이 쉽게 파손되고(물론 사용자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사용자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본다면 아마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내 자식이던지 아니던지 간에 이 땅에 있는 모든 아이들은 소중한 존재이다. 그들은 현존하는 우리의 미래이다. 그들은 어른들을 통해서 사회를 배운다. 지금의 어른들이 그들을 소중하게 여길 때 그들의 미래가 아름다워지고, 그 아름다움은 다음 세대에도 계속 될 것이다. 언젠가 부터 너무 “내 자식”, “내 새끼”만 소중하게 여기는 풍토가 생겨났다. 예전처럼 자녀를 많이 낳지 않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남의 자식이라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성숙한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