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임상교수의 방에 방문한 적이 있다. 책상앞에는 인턴명단이 붙어 있다. 이름 옆에는 볼펜으로 숫자가 적혀있다. 들여다 보니 4년동안의 평균성적이 적혀 있다. 이유는 짐작이 간다. 인턴들의 학생 때 성적을 적어두는 것이다. 그 교수님에게는 “성적은 곧 성실도와 비례한다”라는 전제를 둔다고 생각된다. 나도 어느정도 그 생각에 동의하지만 100%는 아니다. 그런 전제는 모든 학생들의 두뇌나 환경이 비슷하다는 조건이 주어져야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교수들은 성적의 의미를 그렇게 부여한다(사실 교수들은 학생때 성적이 대부분 좋은 분들이긴하다. 나를 제외하고). 그런 이유로 인턴 뿐만 아니라 레지던트에 남을 때도 학부 때 성적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물론 그런 것 다 배제하고 인턴성적과 시험을 통해 뽑기도 한다. 성적이 좋다고 다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의 성품 중 중요한 요소가 “성실”이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는 당분간 계속 될지도 모른다.
작년에 연세의대가 성적을 점수가 아닌 Pass 또는 non-Pass(사실은 Fail)로 표기하기로 했고,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 이야기를 교수들과 하게되면 가장 큰 이슈가 학생들의 학업동기가 약해지고 학업성취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말한다. 사실 그런 부작용을 생각하지 못했을리 없다. 그것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교수들이 생각하는 좋은 성적의 학생은 그 만큼 의학적 지식이 풍부하다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의사국가고시는 일정 점수를 넘으면 의사면허증을 발급받는 시스템이지만, 의학에서는 적당히 알면 통과하는 과정이 아니다. 의사는 사람과 질병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체를 하나의 큰 시스템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특정전공과 무관한 인체시스템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들에겐 자신이 남고 싶은 과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점수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1점이라도 더 맞을려고 한다. 때로는 불쌍해 보일정도로 그렇게 처절하게 공부를 한다. 물론 적당히 하는 학생들도 있긴 하다. 내 입장에선 의학을 적당히 배워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의학은 사람과 질병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의대생들의 성적은 단순히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지식만 평가하지 않는다. 술기와 태도 등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총체적인 능력과 인격을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1점 더 맞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라도 더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의사는 방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한다. 컴퓨터가 더 많은 지식을 갖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환자치료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결정권자이다. 그 결정권자에 머릿속에는 의학적 지식이 방대하게 들어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성적은 성실성과 지식에 대한 척도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적당히 배우는 의학이란 없다. 최선을 다해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의학과 의료의 궁극적인 대상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이 싫고 의사가운만 입으려하는 자는 의학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의사의 사회적 책무성은 의사가 져야 할 영원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만이 의학을 배우고 의사가 되어야 한다.
나의 이런 생각은 의학을 배우고 있는 두 아들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